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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2016.03.26.사역팀 예배 설교)


이사야 53장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오늘은 전통적으로 ‘침묵의 토요일’ 보내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날, 무거운 침묵만이 남아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침묵’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본 막부의 엄청난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 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보다 침묵하실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를 모를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떠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또 깊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문제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을 때 이러한 침묵은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늘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한번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날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예수님은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을 때에도 침묵을 유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았습니다. 잠잠하게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서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저지르지도, 거짓을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했고, 불의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오해를 받고,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독을 당할 때에도, 고문을 당할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백하며 죽는 마지막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죽음이셨습니다. 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로부터 오는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한 죽음을 대신 치루어 주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철저히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며 죽는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은 진정한 고난은 하나님과의 지독한 단절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침묵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어린양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기꺼이 침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침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비록 그 순간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의 고통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길, 절망의 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희망의 길, 승리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은 예수님의 순종이었습니다. 침묵은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침묵은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힘들지만 침묵으로 순종해내는 것, 자신의 말을 하고 싶지만 침묵으로 겸손해지는 것, 실패와 절망밖에 보이지 않지만 침묵으로 믿어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말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이지만, 침묵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지만, 침묵은 우리의 생각을 깊어지게 합니다. 

말이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이라면, 침묵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과 더불어 내면으로 잠잠해지는 침묵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신앙에만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고, 자신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간증이라는 명분으로 말로 가득채운 자신을 드러내는 데 급급합니다. 다른 이의 삶도 말로 재단하려고 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가 조금만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말로 그 사람을 위로하려고 합니다. 또 말로 하나님을 규정짓고, 하나님을 증명해내느라 분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하나님을 저런 분이야 말로 드러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에만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말로 자신의 욕심과 자랑을 리스트화해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자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말로 가득 찬 나를 하나님께 제시할 때가 많습니다. 다 이해하려고 하고 다 설명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말로 해명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한 만남입니다. 좋은 아내와 남편을 만나고 싶다면,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나납게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은 사람을 만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는 말로 다 해명되지 않습니다. 삶 역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과 말 사이의 빈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만큼,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침묵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침묵 안에서 신뢰하는 것 그것이 진짜 깊은 기도입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 자신의 자아를 비워내는 것,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하나님께 내 공간을 내어드리는 것, 그래서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빈 공간 안에 거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침묵이 단순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단절입니다. 침묵은 오히려 말하지 않고 통하는 것입니다. 신뢰하기에, 사랑하기에 말이 불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말이 다 담을 수 없기에 말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밀양 이야기 - 말로 설명되던 하나님에서 침묵으로 경험되는 하나님으로)


오늘은 침묵의 토요일입니다. 침묵의 의미를 알기엔 우린 아직 너무 어린나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침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의미에서 놀라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러한 침묵이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침묵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침묵을 닮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침묵의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