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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총명 (2016.04.17. 대학부 집회 설교)


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오늘 설교는 중간고사 특집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도 지혜와 총명입니다.


여러분 지혜와 총명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어제 이름이 창대인 장모군과 대화를 하면서, 요즘 여러분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공부를 잘하고 무엇보다 학점이 높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들이 생각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대학에서는 잘 외우는 사람, 정답을 잘아는 사람,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잘 대답하는 사람들을 똑똑한 사람이라 평가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성장반을 하고 교육을 하다보면 대부분 토의하고 자기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듣고 적는 것에 익숙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중간고사를 잘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노하우가 필요한데 오늘 말씀은 조금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간고사 특집이긴 하지만 중간고사와는 별로 상관 없는 말씀이지요. 


오늘 말씀은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유다라는 나라에 침공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유다에서 여러 가지 기물들을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약탈하였는데 유다에서 엘리트들을 끌고 돌아간 것입니다. 바벨론은 침공한 나라에서 높은 계층의 영리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신들의 왕을 보좌하는데 활용했습니다. 인재를 약탈해서 나라의 부강함을 더 강화했던 것이지요. 그때 끌려간 사람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 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벨론 말과 문학을 배웠습니다. 왕궁의 규율과 예절을 배웠습니다. 바벨론 문화를 배우고 학문을 배웠습니다. 이를 통해 미래의 바벨론 인재로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더 강요된 것은 바로 바벨론 신전에서 제사를 지낸 음식 특별히 제사를 드린 고기와 술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바벨론 종교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독특한 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공부를 했지만, 바벨론 종교에는 융화되기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몸은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신앙은 유대인의 신앙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환관장에게 도전적인 제안을 하였습니다. 바로 고기와 술 대신 채소와 물만을 먹기를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왕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몸 역시 자신이 아니라 왕을 위해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통해 자신들의 몸이 망가지면 큰 처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들은 채소와 물만 먹고서도 얼굴은 더욱 좋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지켜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이러한 태도는 한평생 이어집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고자 불속에도 들어가게 되고, 사자굴에도 들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과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지혜와 총명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통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에서도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깐 시험기간 기도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학점을 얻어야지 하는 교훈을 얻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위에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 전체의 맥락, 나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바를 보면 이러한 이해는 1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의 진짜 위대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바벨론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아는 방식으로 살아감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니엘은 제국의 가장 큰 권력자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가 큰 고민 없이 바벨론에 순종했다면 다니엘의 삶은 승승장구했을 것입니다. 놀라운 부와 권력, 명예가 그의 삶에 풍성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제시된 조건은 단 하나 바벨론의 왕에게 온전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명과 삶의 토대는 무엇인가? 나를 흔드는 내 마음의 근원적인 욕망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신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했던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암기력이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은 판단력과 창의력이 탁월한 것만도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은 더 높아지는 길, 더 성공하는 길을 잘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은 바로 근원적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것을 알 때 우리는 단단한 반석위에 설수 있습니다. 욕망을 삶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은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두려움을 삶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은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안락함을 삶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은 안락함의 노예가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권력과 문화와 논리가 자신의 삶의 근원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은 아무리 많은 재물과 성공이 자신을 높여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뿌리가 우상이면 결국 자신은 우상의 노예에 불과함을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참된 지혜와 총명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통해 자신을 붙잡고 있는 우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참 자유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닮은 존재로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자신안에 두려움과 불안함, 열등감을 직면하고, 욕망과 탐욕, 인정욕구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윤리적 차원과 구조적 차원의 악을 성찰하며, 근원적인 해방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지혜와 총명인 것입니다.  


잠언 1: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와 지식은 근원적인 토대에 하나님을 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에서 바울은 모든 유익하던 것들을 장해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존귀한 것으로 여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의 근원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박수와 술객은 우리말로 하면 마술사와 주술가입니다. 당시 바벨론 종교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습니다. 도시의 수호신 마르둑, 폭풍의 신 엔릴, 예술의 신 에아, 정의의 신 샤마시 이러한 신들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신들의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신의 이름으로 추구하던 번영, 풍요, 아름다움, 힘의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절대 다니엘과 친구들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열배라는 표현을 통해 넘사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와 총명을 간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와 총명을 위해 깊이 성찰하고 공부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를 걸고 이 진리를 추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아무런 생각 없이 끌려가다 인생의 끝을 맞이하지 말고, 참된 지혜 가운데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