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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2016.05.20. 대학부 철야 기도회 설교)


마태복음 11장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밤 이곳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여 오신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큰 은혜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번 기도회 주제를 보면서 참 재밌었습니다. 사실 이게 말이 안되는 주제입니다. 쉼을 하려면 말 그대로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벽 네시까지 안자고 기도하면서 쉼이라니, 주제를 ‘빡셈’ 이런걸로 해야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거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육체의 고단함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의 끝판왕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이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쉼이다. 하나님 안에서 쉴 때 진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면 도저히 정할 수 없는 주제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왔나요? 오늘 그 은혜를 한번 마음껏 누려보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큰 부담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새벽 네 시까지 기도를 해도 아 잘 쉬었다. 안식을 취했다. 은혜를 받았다. 회복을 얻었다 할 수 있을까 고뇌에 빠졌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설교 부탁을 하시며 많이 기도하시고 아이들 영혼에 쉼과 안식을 주세요라고 말씀하셔서 그 부담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내가 전하는 성경 지식들, 신앙 생활에 대한 교훈들, 삶의 지혜들이 과연 우리의 마음에 샘물과 같은 지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나 역시 이 말씀을 준비하며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구나, 나 역시 내 스스로 하려고 하고 있구나, 안식이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내려 놓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말씀의 내용 뿐 아니라 말씀의 준비도, 말씀의 선포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족한 입술로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만나길 소망합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 가운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은 쉼, 곧 안식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하신 일은 바로 안식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쉴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실제로 시편 121편 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우리와 더불어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고 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의 반대 개념은 일이 아닙니다. 노예적 삶입니다. 이집트의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 이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을 준수할 것을 가르치시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안식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도 이 안식을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안식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일을 해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병을 고쳐주는 것 조차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라 생각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극단적인 일하지 않음을 안식이라 생각했던 유대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창조주이심을 기억하는 것,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기억하는 것, 우리의 구원 또한 하나님께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 평화를 누리는 것,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안식이라 선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진짜 안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선언하셨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안식해라, 쉬어라 강조하는 데 우리는 왜 안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첫째는 생존의 위협 때문입니다. 여러분 서커스에 가보셨나요? 그 서커스에 가면 줄타기를 합니다. 긴 장대를 들고 아슬아슬 줄을 탑니다. 그 줄을 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심장이 쿵쾅쿵쾅 긴장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긴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물망이 그 줄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떨어진다고 해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 그물망이 없이 줄을 타는 곡예사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49.6%에 이르고, 노인 자살율은 10만명당 116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청년층의 6배도 넘는 숫자입니다. 천명중 한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실패하면 쉽게 재기할 수 없고,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이 다가오는 삶 그것이 우리를 안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이러한 현실 위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입학의 때, 취업의 때, 결혼의 때 하나하나를 붙잡고 나아가려고 하다보니 안식할 틈이 없습니다. 학점, 알바, 경험 모두 놓혀서는 안되기에 우리는 점점 안식하기 어려운 삶에 쳐해져 있습니다.


둘째는 관계 속에서의 인정 때문입니다. 제가 새친구 교육 때 했던 내용인데요, 유교 사회에서 도덕 윤리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삼강오륜 아시죠?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유교적 질서가 뿌리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보이는냐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의 평판과 인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비단 친구와의 관계 뿐 아니라 부모님과의 관계, 부모님과 부모님 친구와의 관계, 선생님과 제자와의 관계, 선배와 후배와의 관계, 교회에서는 어른들과의 관계 등 매우 촘촘하게 그물처럼 짜여진 관계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예의를 보여줘야 하고, 능력을 보여줘야 하며, 성취를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 조언과 기대 속에서 우리의 삶을 조율합니다. 거대한 인간관계 안에서 우리를 끌어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학벌, 외모, 성품, 심지어 연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진정한 안식을 취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 자유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가장 어려운 것중에 하나입니다.


셋째는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앞서 두 가지는 우리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이라면, 이것은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공격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을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성찰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법을 상실했습니다. 하늘을 향한 꿈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땅에 기댄 욕망뿐입니다. 얼마전 패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 다큐에서는 명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옷은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이 입을 수 있는 옷, 귀족이 입을 수 있는 옷, 평민이 입을 수 있는 옷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러한 기준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왕실이 사라지자 왕의 물건들을 만들던 장인들은 밖으로 나와 물건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에르메스, 루이뷔통 등 당대의 명품들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벨트는 가짜입니다. 이런 명품들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고, 만족감을 누린 거입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더 아름다운 배우자와 살고 싶은 마음,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은 마음, 더 이름난 대학 학위를 얻고 싶은 마음, 더 강한 힘을 얻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삶을 가열차게 몰아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 안식은 가장 먼저 제껴야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더 잘살기 위해 애쓴 우리나라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적은 모습은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생존과 인정과 욕망을 위한 삶은 우리에게 안식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너무도 힘든 삶을 살게 되었고, 무엇보다 참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일상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참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안식이 없는 삶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사는 시대입니다. 현대 이전의 삶은 삶의 질의 측면에서 볼 때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던 시절은 무려 2천년전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고구려 초기였지요. 의료 기술도 없고, 식량 재배도 언제나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더욱이 유다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반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극소수의 부유층 빼고는 삶이 처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오늘 먹었다고 해서 내일 먹을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고, 오늘 아프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건강하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도처에 억울한 일과 슬픈일이 많았고, 삶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다 못해 이해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3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믿던 사람이 모두 부자가 되었을까요? 이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모두 늘 건강했을까요? 이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다 높은 자리에 올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박해를 받고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모두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오지에서 해외에서 목회하시고 선교하시는 분들 중에 여전히 하루하루 돈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병마와 싸우고 힘들게 사는 분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염려하지 말라’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우리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온전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 온전한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사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실패하지 않으며,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죽지 않으며,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참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있는 존귀한 자녀입니다. 


로마서 8장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생존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생존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더 오래 살고자 창고를 짓고 곡식을 저장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것을 내어 다른 이들의 생존을 도울 것입니다. 그 도움으로 생존이 어려운 세상을 바꾸어갈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이 평가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인정을 받고 싶어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판단이 우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보배라 선언합니다. 그 토대에서 우리는 온전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다른이들을 평가하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욕망을 가져라 부추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기쁨을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선포할 것입니다. 명품이나 좋은 집, 좋은 자동차와 같이 썩어 없어질 것들에 우리의 자존감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삶을 더 검소하게, 더 단순하게, 더 청명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부활 생명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생존의 위협, 관계에서의 인정,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려야할 진정한 안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이제 한번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여러분을 진정으로 안식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지 못하게 하십니까? 오늘 기도가 그것들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는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간구하십시오. 그 놀라운 사랑, 그 놀라운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 놀라운 안식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