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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1-30 (2017.01.13. 아침묵상)

category 묵상/마태복음 2017. 1. 13. 20:10

눈이 참 아름답게 내리네요. 마음이 참 평화롭습니다. 오늘 찬양 참 좋아요. 꼭 들어보세요. 이제 한주도 끝나가네요. 잘 마무리하시고, 오늘도 주님 묵상하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쓰고나니 화창해진 날씨!네요.) 


<말씀>

마태복음 5장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나눔>

1. 사람의 법은 사람의 속내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속마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속마음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떠한 사람의 속내는 파악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고, 예단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사람의 속마음을 판단하고 법을 적용한다면, 그 판단은 객관성을 잃은 판단, 자의적인 판단이 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2. 또한 속마음으로 판단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더 한가지 더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완벽하고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란 바람과 같아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욕망과 감정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속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심판한다면, 누구도 그 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 이러한 두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사람이 만든 모든 법의 기본은 속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한 행동과 말, 그리고 결과를 통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법을 만들고 적용할 때에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인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의 법은 이것을 뒤집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말한 두 가지 상황을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근본적인 마음을 물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5.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사람 앞에서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법은 사람이 판단하기에 그 적용과 판단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서 판단하기에 그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결과론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6. 만일 우리가 법을 겉으로, 행동으로만 지키고 마음으로는 다른 방향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했다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선적이요 기만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판단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깊이 직면하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우리를 고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7. 둘째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소극적 대처로서의 율법 준수가 아니라 적극적 방식으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윤리의 핵심은 ‘사랑하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살인 금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되는 가장 최소한의 규칙입니다. 그러나 친구에게 라가(직역 : 바보, 돌대가리), 모레(직역 : 미련한 놈, 미친놈)라 비난하지 않고, 친구를 일상 속에서 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간음 금지’는 사랑의 언약을 맺은 남녀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성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을 멈추고 절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몸을 내 욕망의 도구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존귀한 존재로 여겨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8. 예수님 윤리의 핵심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주문을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식적으로 윤리를 지키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잘 살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하나님과 네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선포입니다.


9.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로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먼저 본을 보이셨으며,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으며, 성령님께서는 그 사랑과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사랑은 우리의 능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 힘으로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 안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