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확신에서 고백으로 (2020.04.12. 부활절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5장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안식일은 사실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주일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에 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부활을 기념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부활이 왜 중요할까요? 예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 고백이 곧 부활을 고백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 그것이 곧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죄 없으심과 그 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진 죽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불의와 부조리, 사망의 권세가 결국 패망하고 정의와 생명이 승리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이 세상이 끝나는 날 하늘에서 다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죽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 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 이래 죄와 죽음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의와 생명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온 세상에 선포합니다.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오늘 부활절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묵상해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부활절’인데 부활에 관련된 복음서의 내용이나 ‘고린도 전서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준비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과 부활이 깊은 차원에서 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이어가는 말씀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곧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오러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이 땅에 온 것이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지킬 때에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로 여섯 가지를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지지난주, 지난주 말씀을 통해, 살인 – 형제를 존귀히 여기는 것, 간음과 이혼 – 사람을 수단이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대하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예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로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맹세에 관한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맹세하는 문제에 관한 말씀이지만, 조금 더 크게 보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렇게 계명이 이어지는 데, 그 중 거짓증거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깊게 헤아리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다같이 말씀을 보며 주님의 뜻을 찾아가보겠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너희 옛 사람, 곧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는 말씀을 여러분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레위기 19장 12절, 민수기 30장 2절, 신명기 23장 21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민수기 30장
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신명기 23장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속을 할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서약을 했으면 꼭 그 약속을 지켜라.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네게 요구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맹세에 관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허락하되 그 맹세를 정직하게 하고, 그 맹세의 약속을 굳은 의지로 반드시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구약의 말씀을 뒤집습니다. 다같이 34절에서 37절을 봉독하겠습니다.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맹세를 아예 금지시켰을까요? 그것은 맹세를 지키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것, 나아가 내 인생을 내가 뜻한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의 능력만으로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의 기억이 완전하다고 말할수 있느냐, 너희의 판단이 완전하다고 말할수 있느냐, 너희의 의지가 완전하다고 말할수 있느냐,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내가 하는 말이 다 진실입니다. 너희가 내가 하는 맹세는 반드시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다 옳습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상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의 문제로 바꾸신 것입니다. 마치 계산기가 고장나 있다면, 그 계산기로 계산하여 나온 숫자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이 계산기로는 정확한 답을 낼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 아니냐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맹세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깊이 성찰하라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에 맹세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땅에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예루살렘에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성이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네가 무엇인가를 맹세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머리까락으로도 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머리카락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율법은 열심히 지켰으나 실제로는 율법의 정신을 다 놓쳐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열심히 지키되, 그 율법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율법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이처럼 율법의 형식만을 지키고, 그 정신을 다 잃어버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람에 대한 과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다 알 수 있는 존재들이야. 우리는 율법을 다 판단할 수 있는 존재들이야. 우리는 율법을 다 지켜낼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은 잘 지켜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자기들은 엘리트요, 선택받은 사람들이요,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무서운 함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요, 둘째는 다른 이들에 대한 무시와 정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선택했다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자기를 높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온전히 옳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자기가 완전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율법의 근본정신과 가장 반대되는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을 넘어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 자기 자신이 피조물이요, 한계가 있는 사람이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데에서 가능합니다. 이러한 나를 주님께서 사랑해주셨다. 이러한 나를 용서해주셨다. 이러한 나를 품어주셨다 고백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고,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로하여금 주님을 알 수 있도록 해주셨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로 주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해 주셨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37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확신합니다. 맹세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저 피조물의 자리에서 주께서 네게 보여준 대로,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대로 고백하여. 옳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기억과 판단과 의지를 무시하는 말씀으로 오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을 주셔서 기억력을 주시고, 판단력을 주시고, 의지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기억하고, 매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판단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해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것은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지 않고, 사랑의 자리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의 막바지에 이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 말씀입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베드로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굳은 맹세를 주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아니야 베드로야 진실로 너에게 말하는데, 너는 오늘 밤 닭이 욹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거야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시한번 맹세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고동락 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였던 베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칼을 뽑아들고 예수님을 지키려 했던 베드로, 불과 같았던 베드로는 굳게 주님께서 맹세한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자 상황을 보려고 예수님을 심문하던 가야바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아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마지막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의 의지와 결단과 약속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닭이 울었고, 말씀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나타나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비루한 존재인가,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깊이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베드로가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은 이러한 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을 바라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식사하시고,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여쭈어 보셨습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힙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더 이상 당당하게 내가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맹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자신이 아는 바,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를 고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이러한 자신을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부터 놀라운 삶을 삽니다. 자기가 스스로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선언 했을때에는 그저 배신하고 말았지만, 그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을때에는 실제로 죽기까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단단한 반석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껏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의 능력을 믿고, 자기의 의지를 믿는 사람에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용서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자랑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주님이 주신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전의 나는 죽었고, 이제 예수님과 더불어 나는 새롭게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누리는 것이 곧 부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