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원수를 사랑하라 (2020.04.26.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5장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지금 아침 묵상을 통해 요한1서 말씀을, 금요기도회를 통해 에베소서 말씀을, 주일 예배를 통해 마태복음을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세 말씀들이 모두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실은 신약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사랑하라 말씀하는 것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너희도 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All You Need is Love)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야 말로 정말 어려운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머리로는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매 순간 느낄 것입니다. 저 역시 매주 사랑에 관하여 설교하고 있지만, 제가 말씀을 전하는 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득해지는 마음 뿐 입니다. 오히려 설교를 하는 순간부터 큰 숙제를 짊어지는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시겠다 말씀하신 것 입니다. 사랑이 이처럼 어렵기 때문에 계속 사랑에 관하여 말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상기하고 곱씹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적셔서, 어느 순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길 소망합니다.

이번 주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드셨던 여섯 가지 사례 중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겉으로 지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 않는 것을 넘어서 사람을 멸시하지 말고 존귀히 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사람을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온전히 관계 맺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아내를 대할 때, 남편을 대할 때에도 서로를 소중히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겸손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악을 악으로 되값지 말고 더 고귀한 선으로 악을 뒤집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모두 율법을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하지 말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깨달아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차점이자, 정점이자, 최고점인 원수 사랑에 관하여 함께 나누겠습니다.

다같이 오늘 말씀 43절, 44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절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 이니라.

이 말씀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성경 만큼의 권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책으로 여겼던 외경 ‘집회서’에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2장
3   악을 일삼는 자와 인색한 자에게는 선행을 베풀지 말아라
4   경건한 이는 도와주고 죄인은 돕지 마라
5   겸손한 이에게 선을 행하고 불경한 자를 돕지 마라. 불경(교만)한 자에게 음식을 감추고 주지 마라. 그가 음식을 먹고 너를 제압할까 두렵다. 네가 그에게 한 모든 선행의 댓가로 악행이 두배로 너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회서에는 정의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대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 하지 않는 자, 죄인, 교만한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자를 도와주면 오히려 악을 키우는 일이 될 터이니 돕지 말아라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생각을 바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쉽게 따르지 못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즉각적으로 이러한 마음들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 왜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 명령하십니까? 우리를 해치는 원수들은 악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을 우리가 용서한다면 오히려 악이 더 번성할 것 아닙니까? 그 원수가 나의 마음을 계속 뒤집을 것 아닙니까? 왜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십니까? 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함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기쁨을 얻고 평안을 얻고 행복을 얻는 길은 저 원수가 망하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네 돈 떼어먹었던 저 원수가 병들고 가난해져서 비참해져야 내 속이 시원할텐데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제 불타오르는 미움의 감정과 분노의 감정이 단시간에 사라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과 그를 위한 기도가 형식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실제 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들은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듣는 시간, 또 우리의 삶의 시간들 속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답해주셔야 할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오늘 떠오르는 원수를 생각하며,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함께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45절~17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죄인들의 심판을 유예하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여전히 그들의 생명을 붙들어주시고,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원수를 참고 용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시 죄인들의 대명사로 불렸던 세리도 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과 욕망을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죄된 본성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죄를 넘어서는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감정, 욕망, 유익을 내려놓는 사랑입니다. 기꺼이 자신을 내어줌으로 드러나는 참 사랑, 그리하여 예수님 닮아가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이 원수 사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혈연의 경계, 지역의 경계, 민족의 경계, 계급의 경계, 성별의 경계, 인종의 경계, 학연의 경계, 재산의 경계, 이 밖에서 수많은 경계들이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 경계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를 갈라지게 하고, 나아가 원수가 되게도 합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 정치적 사건, 경제적 사건이 쌓여서 만들어진 이 경계가 끊임없이 우리를 다투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죽이게 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는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KKK, 관동대지진, 유태인 학살)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경계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형제에게만 문안하지 말아라. 혈연으로 사람을 구분짓고, 그 밖에 있는 사람을 원수 만들고, 그들을 미워하지 말아라. 그러한 것들은 모두 우상이다. 원수 사랑은 이러한 경계를 허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원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가 떠오르기 때문에 충격적이고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원수 사랑을 한번 더 곱씹고, 그 의미를 알아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나아가 주님께서 원하셨던 그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시고, 따라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길 소망합니다. 

원수사랑은 우리에게 깨우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라. 그리고 그 사랑은 사실 너에게 먼저 임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45절에서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를 선인, 의로운 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사실 이 말씀에서 악인이요, 불의한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우리가 주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길이 참으시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죄인 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찾아와주시고,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그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휩싸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 저희는 도저히 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의 마음이나, 저 사람을 보면 너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보아라. 네가 나를 알지 못했을 때, 네가 나에게 원수였을 때 나는 너에게 쉬지 않는 사랑을 베풀었고, 너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했으며, 너를 기다리고 끝까지 사랑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이 주님의 사랑을 조금씩 깨달아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원수 사랑은 단시간에 은혜를 확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며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 – 감추어진 빛)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엉켜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큰 잘못을 했어도, 시간이 지나다보면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과 잘못이 뒤엉키고, 오해와 오해가 뭉게어져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비극들이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러는 과정에서 상대의 잘못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은 합리화 되고, 잊혀지고, 덮혀지게 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며 살아갑니다.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잘못만을 곱씹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나 안으로 굽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46절에서 넌지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람이란 결국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미워하기 마련이란다. 결국 모든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지.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자기 주장에 갖혀 있으면 세상에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자기의 마음을 열어서 먼저 다가가는 사람, 갈등의 고리를 멈추어내는 사람, 나아가 자기의 잘못과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을 통해 화해와 평화와 사랑은 이루어진단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안에 갖혀 있는 마음을 열게 되는 열쇠가 됩니다. 내 마음이 미움에 싸여 닫혀 있었구나,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상황이 있었겠구나.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했구나. 내가 먼저 다가가야겠구나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 나아가 포용적인 사람, 관용적인 사람,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은 결국 나를 성장시킵니다. 예수님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원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47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앞서 우리에게 수많은 경계를 넘어 사랑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러한 경계를 만드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갈라지게 하는 모든 우상들입니다. 더 강한 제국이라는 우상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죽이는 일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경계를 강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더 많은 재물이라는 우상을 얻기 위해 연약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일들이 계층과 계급의 경계를 강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더 우월한 부류라고 생각하는 자긍심이라는 우상을 얻기 위해 인종 간, 성별 간 경계가 더욱 강해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인가를 더 얻고, 더 가지지 위해, 편안한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를 더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와 다른 편을 구분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수가 생기고, 이러한 과정에서 갈등과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과 다툼에서 발생한 수많은 삶의 문제들에서 우리의 상처와 아픔과 미움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것에 기대어 원수를 두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상을 강화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해 진짜 원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진짜 원수는 이 모든 갈등의 배후에 있는 악한 마귀요, 우상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원수라 생각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있느라, 우리가 정작 원수라고 생각하는 우상은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우리의 진짜 원수인 우상을 무너뜨릴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한 신들과 흑암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입니다.

원수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용서하고자 할 때 상대방에 대한 미움으로 가려졌던 우리의 눈의 허물은 사라지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지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작게는 우리 가정에서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동일합니다. (제 아내도 보고 있는데 힘주어 선포합니다.) 남편, 아내는 원수가 아닙니다. 악한 권세와 함께 싸워나갈 가장 가까운 동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국가, 성별, 계층, 인종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도록 하는 그 우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원수 사랑은 이 세상을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주님의 핵심 명령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옵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상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곱씹을 때 우리는 놀라운 주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모든 죄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 나 역시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나 역시 누군가의 원수였음을 깨닫고, 자신에게만 주목했던 나를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것을 통해 예수님 닮아가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우리를 원수케 하는 악한 권세와 우상을 깨닫고, 이 땅을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가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원수 사랑이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나 의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하고, 나와 상대의 관계를 깨닫게 하며, 세상의 구조와 하나님 나라의 길을 깨닫게 하는 통로입니다. 원수 사랑은 오늘 말씀 48절처럼 우리를 온전케하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말씀처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새벽 교회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