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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함과 온전함 (2020.04.05.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5장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우리는 지지난주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형식 뿐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회복시키신 것임을 나누었습니다. 그저 율법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핵심이요 바탕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따르는 것,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사랑 이렇게 여섯 개 부분에서의 구체적인 적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그중 첫 번째인 살인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만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다른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가져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고, 사람의 생명을 주님 주신 선물로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시는 지를 기억하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비하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존귀하게 여기자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근본 정신이며, 예배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깊은 사랑을 기억하고 붙들 때에만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간음이란 부부간의 신실한 관계를 깨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신 뒤, 간음하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는 유대인의 속담처럼 부모와 자녀 가운데 맺어진 깊은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표상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두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인데 지난 주 말씀 드린 것처럼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존귀히 여기고,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여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세 번째 계명이 바로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관계의 신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계명이 직접적으로는 부부사이의 계명이면서 넓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랑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뜻을 함께 찾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다같이 오늘 말씀 27절, 28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우리가 간음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간음이라 생각할까요? 보통은 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것을 간음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 관계를 그 기준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교류만 있었어도 그것을 간음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군가와 정서적 교감이나 부적절한 일이 있는 차원이 아니라, 음욕을 품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간음을 정한다면, 어떤 사람이 간음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뒤 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9절, 30절 말씀입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만일 눈이 그러한 죄를 저질렀다면 네 눈을 빼어버리고, 오른 손이 그러한 죄를 저질렀다면 네 오른 손을 찍어버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선 말씀도 무서운데, 뒤에 말씀은 더더욱 무섭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중에 누가 눈이 남아있으며, 누가 손과 발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상징적인 이야기야, 우리는 다 용서받았잖아 하면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충격적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죄의 엄중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곧 종교 지도자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음행을 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께 말하며, 율법에는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용서해주어라라고 말하면 예수님을 모세의 율법을 어긴자라고 몰아붙이고, 돌로 쳐죽여라라고 하면 사랑과 용서가 없는자라고 몰아부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여인을 목숨을 두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디갔느냐, 정죄하던 사람이 어디갔느냐 물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던 사람들이 왜 떠나갔을까요?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자기의 한계를 알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를 멈추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날카롭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거룩한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정말 그럴까’ ‘간음이라는 것이 꼭 일을 저지르고, 직접적인 무엇인가를 해야 그것이 간음일까. 그것만이 간음이 아니야’, ‘네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것, 곧 음욕을 품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 그것도 바로 간음이야. 하나님의 기준은 너의 행동을 넘어서서 네 마음을 감찰하고 계셔. 네 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정결하지 않으면, 너는 실제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중 어느 누가 나는 깨끗합니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중 어느 누가 나는 거룩하고 저 사람은 부정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기준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지극히 겸손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 나는 이것으로 의로운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을 모욕하는 지극히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엄중한 기준을 깨닫는 사람은 지극히 겸손해집니다. 내가 죄인이요.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은혜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앞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적으론 자기가 더 큰 죄인인줄도 모르고 다른 이를 정죄하려했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또 이렇게 주님 앞에서 큰 죄를 짓고도 용서받았던 음행했던 여인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구나. 나 또한 용납 받았구나. 겸손한 마음, 감사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에 어떤 경우에 마음이 굉장히 상하나요? 여러 경우들이 있겠지만, 그 사람이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만났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마음이 굉장히 상합니다.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부분만을 사랑하는 것, 나의 일부분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돕는 사람정도로 생각할 때,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벌어오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때, 부모가 자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면을 세워줄 사람 정도로 생각할 때, 자식이 부모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필요를 채워줄 사람 정도로 생각할 때 우리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친구간의 사이도 마찬가지지요, 친구가 나를 이용대상으로 생각하고 만난다면 그것은 상호간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 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가득 차있고, 그 가운데에서 지치게 만드는 일이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갑니다. 우리가 음욕을 품고 이성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네 욕망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을 존재로 사랑하지 않고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할 때 약속합니다.  “나 (아무개)는, 그대 (아무개)를, 배필로 맞이하며, 오늘부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더 좋을 때나 더 나쁠 때나, 더 부자일 때나 더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변함없이 그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부부로 살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토머스 크랜머(1489~1556) 영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캔터베리 대주교(1533~56)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BCP)』(1549) 이 고백은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 사람의 육체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는 것 그것이 결혼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 내 감정이 새로운 사람에게 향했다고 해서 감정을 바꾸어 버리는 것,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나에게 많은 것을 줄 것 같은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그 사람으로 바꾸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간음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을 할 때, 그 사람을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사랑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잘못을 저지르면 눈을 뽑아버리고,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잘라버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몸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보다 온 몸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잔인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경고를 통해서도 온 몸이 핵심이요, 각 지체는 온 몸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의 일부만을 사랑하고, 사람이 가진 것을 사랑하고, 사람의 꾸미고 있는 것을 사랑하느라 그 온 몸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상대를 볼 때에도 상대의 일부에 내 마음이 빼앗깁니다. 나를 바라볼 때에도 내 일부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그것을 잘라내고, 온 몸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부자라서 그 사람에게 마음이 빼앗긴다면 부자로서의 그를 빼고 그 사람 전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해지고 있다면, 그 돈을 잘라내서라도 내 온 존재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온전한 존재로서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1절 32절 말씀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율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말씀은 이혼당한 여인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서 이혼 증서를 써줄 것을 명령했지만, 남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뜻대로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 그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었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참 뜻을 구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만함으로 아내를 정죄하고, 자기 욕망 때문에 아내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분명한 음행이 없다면 아내를 버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신 아내를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게 여겨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함을 염두해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앞에서 내가 진실로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는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인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에 대한 겸손함과 그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가 돌아보았습니다. 더불어 나는 내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내 가족과 친구들을,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특별히 제 아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품고 섬기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주님의 말씀 앞에서 부끄럽게만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않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도 못했던 그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불완전한 사랑으로 매순간 실패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처럼 죄를 짓는 부위를 모두 잘라낸다면 우리의 몸에 남아 있는 부위가 어디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자신의 온 몸을 던지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못에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대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자요, 더 이상 자기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 지셨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기억하는 주일이 됩시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사랑의 결단을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겸손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