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예수님의 방법 (2020.04.19.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5장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조항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을 넘어서,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곧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깊이 이해시켜주시기 위해 율법의 완성의 구체적인 예를 6가지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지난 3주간 그 중에서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이렇게 네 가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확대해서 이해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죽이는 것을 넘어서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히 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그 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모든 사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랑하신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대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라도 모욕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내 기준과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존귀하게 대할 것을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또한 확대해서 이해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수단화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나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한 존재가 아니라 내 필요를 위한 도구로 보는 것, 그것이 간음을 저지르고 이혼 증서로 아내를 버리는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몸의 한 부분보다 전체가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전 존재로 온전히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맹세한 것을 잘 지켜라. 약속한 것을 잘 지켜라 하는 차원의 문제에서, 우리가 과연 맹세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가를 성찰하는 차원의 문제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당당하게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가 단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맹세를 지키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주님의 사랑을 의지할 때에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보복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8절에서 42절 말씀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구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24절 말씀, 레위기 24장 20절 말씀, 신명기 19장 21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1장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위기 24장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명기 19장
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다소 잔인해 보이는 법 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당대 상황을 비추어서 살펴볼 때엔 매우 진보적인 법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법은 약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법이었습니다. 권력과 힘으로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려는 일들이 빈번했던 당대 상황 속에서 이러한 법은 약자들을 지켜주는 법이 되었습니다. 특히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그 보상을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신체형으로 되값게 함으로서 무분별한 폭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높은 계급에 힘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실수로 피해를 당했을 때 자기가 당한 피해보다 훨씬 더 큰 복수를 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때에 이 법은 자기가 당한 만큼만 복수하도록 한정함으로써 약자가 부당한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었습니다. 

끝으로 이 법은 복수가 점점 더 커지는 일을 막아줌으로서 사회가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람들이 자기 욕망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살아가던 시절, 힘의 논리와 약육강식이 당연하던 시절,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보호해 줄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법을 한 단계 넘어섰습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들이대라. 속옷을 빼앗으면 겉옷까지 주어버려라. 5리를 너에게 강제로 일시키면 10리를 해주어라. 너에게 달라고 하면 주고, 빌려달라고 해도 거절하지 말아라.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의 거리를 크게 벌리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심지어 현실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이 말씀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꾸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정신을 지키면서도, 죄악이 번성하고,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바꾸는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율법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나아가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고난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상황을 뒤집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욕을 받고 왼뺨을 들이대는 것은 굉장히 상대를 당혹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욕을 주는 사람의 최대 목적은 그 모욕을 통해 상대방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왼뺨을 들이대는 것은 그 사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대를 압도하는 무서운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상대를 모욕하고 비하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끝까지 상대를 모욕함으로 자기를 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존엄을 존중해줌으로 누가 더 옳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모욕했을 때, 그 모욕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 나아가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를 존엄하게 대하는 존재. 주님은 우리가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속옷을 내어달라 하면 겉옷을 내어주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속옷 하나, 겉옷 하나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속옷을 빼앗는 사람은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의한 사람에게 겉옷을 벗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옷은 단순한 옷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겉옷은 급격히 추워지는 밤에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속옷을 빼앗은 사람에게 겉옷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이요, 완전히 발가벗겨진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존엄성과 생명을 걸어 모든 것으로 불의함을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속옷을 빼앗은 사람에게 겉옷을 내어주는 것은 사실은 매우 큰 당혹을 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서도, 상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하고, 상대의 잔인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자의 불의를 폭로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장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이 일은 모든 일을 바꾸는 큰 힘이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은 누군가가 5리를 강제로 가게하면 10리를 동행하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노역을 시킬 권한이 있었습니다. 5리, 약 1.5km를 짐을 지고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갈 때에도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질 것을 강제로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로마 군인이 너에게 1.5km의 노역을 시키거든, 3km를 함께 가라. 로마 군인에게 있어 3km 노역을 시키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당혹시키는 상황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앞서 겉옷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로마 군인들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 주석에 따르면 여기에서 구하는 자, 꾸고자 하는 자는 단어는 다시 돌려 받을 가망성이 없는 상황을 뜻한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질을 간청할 때, 오늘 말씀은 거저 주어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과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움켜쥐고 더 많이 갖고,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렵고 힘든 이웃,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 나눌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단순히 나 자신의 도덕적인 선함이 되는 것을 넘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바꾸어 가는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 세상의 질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청하기만 하시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당신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세속 정치 권력을 획득하여, 로마제국을 뒤집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모욕과 수치를 감내하셨습니다. 모진 폭력과 학대를 감당하셨습니다. 온갖 불법을 온 몸으로 견디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하나 남은 옷까지 다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세상의 모든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탐욕과 권력과 같은 자기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이 이땅에 오셨어도 알아보기는커녕 죽음의 길로 몰아가버린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폭로되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했던 로마 권력도, 거룩해보이는 의식과 율법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던 종교 권력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며 자기들이 옳다고 굳게 믿었던 대중들도 모두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온 세상에 폭로한 것입니다. 그 힘은 위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폭로를 통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바꾸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선다면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 위에서 주님은 용서하시고, 새로운 주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가장 연약해 보이는 그 방법이 온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길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대로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세상의 변화시켜 나가되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붙들립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자존감이 세상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과 인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욕과 수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살아갑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을 따라갑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힘쓰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손해봅니다. 세상의 방식을 뒤집고 새로운 방식을 선보입니다. 불의와 부정에 고통당하고 희생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 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정을 책임져주시고, 가장 선한 것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조각들을 모으셔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모든 불의와 죄악을 물리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일의 시작이 부활이었음을 믿고, 기꺼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해 나갑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으로 기꺼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입니다. (몽고메리 버스 사건 + 비폭력 무저항 주의 + 셸마 행진 + 워싱턴 연설 + 죽음) 그러나 세상은 인종차별의 야만성을 목격했고,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그들은 모욕당했으나 존엄했고, 폭력에 희생당했으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일하심과 부활 소망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나라 3.1운동입니다. 3.1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관여했습니다. 특별히 희생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비록 당대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고귀한 가치가 되어 훗날 대한민국이 세워지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4.19운동도 3.1운동 정신의 그대로 이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아갑시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함으로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갖고, 기꺼이 주님을 신뢰하며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악을 대면해야 할 때 선으로 악을 갚음으로 악을 변혁시켜 나가는 일들을 이루어봅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이요,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