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형제와 화목하라 (2020.03.28.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5장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혹시 지난주 설교를 기억하시나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형식만을 지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 율법의 참 의미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 또한 함께 말씀 드렸습니다. 율법의 참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율법을 진실로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운데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위에서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그 근본정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적용될 수 있을지를 나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시고, 6개의 구체적인 예(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사랑)를 들어서 율법의 완성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통해 율법의 껍데기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짜 뜻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같이 21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에서 ‘옛 사람’은 모세를 대표로 하는 조상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광야에서 율법을 주셨음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포함하여 613개의 법률 조항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법들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중 십계명은 핵심적인 율법이었습니다. 그 중 여섯 번째 명령이 살인하지 말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한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특히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의로 해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졌을 때에 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그들의 아들이었던 가인이 아벨을 잔인하게 살해한 모습은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간이 자기의 욕심 때문에, 혹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혹은 복수와 분노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러 왔는지를 역사가, 그리고 오늘날 뉴스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십계명을 명령하시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두 번째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 곁에 있는 네 형제, 자매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겨라. 네 형제 자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네 형제 자매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귀하게 여기고 아껴야 함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의 종교적 기득권,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사람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비하하고, 무시한다 하더라도 자기 손으로 죽이지만 않으면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 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들의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둘러대며 정당화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지만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의 핵심을 담은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최소한의 법칙으로 전락시켜 자기를 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율법의 참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은 단순히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진 존재를 모욕하는 모든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천하게 여기고, 여러분과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존재라고 여기는 것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을 존재가 아닌 수단으로 여기고, 여러분 기준에 모자라다고 해서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준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은 대학 나왔다고 해서 못 배운 사람 무시하고, 여러분이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없는 사람 멸시하며, 여러분이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해서 초신자 무시하고, 여러분이 갑이라고 해서 을에게 갑질하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 보시기에 살인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 라가, 곧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사람, 미련한 사람이라고 비하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공회에 잡혀가고,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것은 단순히 이웃과의 관계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니, 나아가, 형제를 미워하고 그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 아니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져 있음을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분이 날 때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물론 누구나 감정적으로 화가 날 때가 있고, 이러한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건강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을 내는 차원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형제를 멸시하고 모욕하고 자기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천하게 보고, 다른 이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게헨나 이야기 –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 자녀를 불에 제물로 바치던 곳의 절망)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조금 더 실제적인 말씀을 합니다. 다같이 23절, 24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할 때 형제와 다툰 일이 생각나거든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예배를 드리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배입니다. 단지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우리의 것을 헌신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정확히 나타납니다. 이사야 1장 11절 말씀입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 죄악, 특별히 형제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일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 곧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그때에 예배를 받으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16절, 17절 말씀입니다.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배보다 더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배보다 더 우리의 정의를 원하십니다. 예배보다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고백의 장입니다. 자식 둘이 있는데 실컷 싸우고 나서 아버지께 애교와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하면, 그것이 기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히 알고, 우선순위를 붙잡을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 26절을 통해 화해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해주셨습니다.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갈등과 다툼은 결국 우리를 심판에 얽매이게 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핍박하고, 모욕할 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그와 갈등할 때 결국 그 화가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문제로, 삶의 문제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짐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알고 갈등 속에서 화평을 이루며, 용서하며 화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다른 누구가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길임을 마지막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결국은 우리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입시다.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를 존귀한 존재로 바라봅시다. 우리 기준에 부족해보이고,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느껴질 지라도, 내 앞에 있는 이 가장 작은 사람을 예수님처럼 여기고 사랑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결단은 가장 귀한 결단으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늘 기도합시다. 주님 내가 이 앞에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 여기게 하시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이 사람을 품고, 이 사람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기도합시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생각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것은 가인의 오해였을지라도, 가인은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느끼고, 자신의 자존감이 무너져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인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깨달을 때 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내 앞의 사람을 보고서는 늘 실패하고 맙니다. 거꾸로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주동안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붙잡고, 다시한번 내 형제 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