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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2020.02.23.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5장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는 지지난주의 말씀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가르침, 특별히 산위에서 가르쳤다해서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시작에 8가지의 복을 선포한 팔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리고 오늘 함께 나누게 될 10절 말씀이 있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우리는 지지난주에 첫 번째, 두 번째 복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고, 지난주에는 세 번째부터 일곱 번째 복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잠깐 회상하며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첫 번째, 두 번째의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심령이 가난 자, 애통한 자는 주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입니다. 내 영혼이 완전히 파산하여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저는 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 땅의 불의와 부조리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크게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며, 주님의 구원이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 백성, 위로 받는 자리로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과 자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된다면 자기 자신의 심령이 가난하구나, 내가 애통하는 자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나라와 위로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다섯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고, 선을 행하되 악한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권리를 찾는 차원을 넘어서 이 땅 가운데 선으로 악을 변화시켜 고귀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지경을 넓혀 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윤리적 차원, 사회 구조적인 정의의 차원,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두 주님의 다스림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배부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 같이 내 이웃도 지극히 사랑하심을 깨닫고 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긍휼이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용서함 받은 사람만이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한 사람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관점으로 세상을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황과 형편, 그 사람의 가치관을 헤아려서 이해하고 품고 포용하며 화해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한 사람은 모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불어 그들이 받게 될 주님의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겪게 될 고난에 관하여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갈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고난’일 수 있음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십니다. 다같이 10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세상은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자들, 곧 악한 세력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권력과 부와 욕망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하면 부딪히게 될 고난이 있음을 말씀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주님의 위로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하며, 주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감당해야할 고난도 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게 되면,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 앞에 두려움과 불안함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과 박해의 길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생각으로, 나는 적당히 신앙생활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 고난에 대해 몇가지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고난을 생각할 때에 몇 가지로 고난을 구분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공부를 안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을 못보는 것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만일 우리가 게을러서 운동도 안하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만 좋아해서 몸이 망가져 아픈 고난 역시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통은 자연의 질서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이처럼 우리가 잘못된 선택들을 하게 되면 잘못된 결과를 맞이하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지키지 않아서 감옥에 가게 된다면 그 역사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법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법이 정의를 위한 법이라면 그 법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성과 결단입니다. 애쓰고 수고하여 최선을 다하고, 옳은 길로 자신의 삶을 인도해야 합니다. 고난을 넘어서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이러한 고난을 넘어가기 위해 주님께 기도만 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인 일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개미에게 부지런함을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의 잘못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는 한 이러한 해석은 조심해서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시대, 중세 시대에는 누군가 ‘고난’을 당했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을꺼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 있는 사람에게 안좋은 눈초리를 보내며, 심지어 정죄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난 속에 있던 사람들이 편견 속에서 더 큰 고난을 받았던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죄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는 판단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고난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코로나 – 중국의 잘못, 이러한 판단은 정말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심판을 빗겨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심판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조금 더 직접적이고 확실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꾸로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고 있으면서 이것을 의로운 사람이 받는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둘째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곳에서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 겪어야 할 어려움과 애씀이 있습니다. 형편을 좋게 만들고, 자녀들을 잘 키워내고, 삶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매일 일정한 고생을 해야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요, 아프고, 애 닳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세우고,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이루어 나갑니다. ‘고진감래’ 쓴 고통이 지나가면, 달콤한 열매가 맺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고난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무수한 비바람을 견디어 내고, 찬서리와 뜨거운 볕을 견뎌낼 때 아름다운 열매 하나가 맺혀지는 것을 참 아름답게 표현한 시입니다. 어떤 고난과 고생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열매 맺게 하며, 깊어지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성장을 위한 고난과 애씀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이 자기의 집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났던 것처럼, 다윗이 숱한 애씀과 고생을 겪어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난을 성장과 성숙을 위한 고난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시험을 잘 보는 것, 영주권을 받는 것 이런 것처럼 과정이 분명한 것도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사실 이 고난이 무엇을 위한 고난인지를 알 수 없는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생에 닥친 큰 슬픔, 큰 아픔, 큰 어려움들은 성장과 성숙은커녕, 우리가 그저 감당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주셨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하나님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 앞에서, 이러한 생각을 조심해야합니다. (어떤 슬픈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런 이런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고통을 통해 나를 성장시켜 주셨다라는 말은 사실,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장과 성숙에 있어 고난은 귀한 통로가 되지만, 모든 고난이 성장과 성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해명되지 않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많은 고난이  사실은 이러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어떠한 잘못이나 죄 때문에 생긴 고난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한 고난도 아닙니다. 그저 고난이 우리 삶 속에 어느 날 불쑥 찾아와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는 고난입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고난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버티고 견디고 참아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들을 겪는 이들에게 이 고난의 이유를 찾아준다거나, 고난의 목적을 찾아주는 것은 오히려 큰 상처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고난과 아픔이 있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장 이러한 고난을 없애고, 능력과 권세로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모두 멈추게 하고 한 번에 회복시키지 않으셨는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방법은 이러한 고난과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고통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인간으로 이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이 겪었던 모든 아픔을 함께 겪으시고, 인간의 애통함에 함께 애통하며 우시고, 인간의 죽음을 겪으신 것, 그리하여 함께 사랑하시는 것, 그 길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창 속에서 소망을 선포하셨는데, 부활하심으로 이 죽음과 고통의 운명이 끝날 것을 선포하셨고, 말씀을 통해 새하늘과 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고난과 고통이 끊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곧 예수께서 다시 오실때에는 이 모든 눈물과 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 말씀입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고난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아픔과 함께 해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눈물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사랑과 위로로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들과 함께 주님을 소망하며,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회복시킬 때까지 함께 그 짐을 나누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난 앞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고난은 어떠한 고난일까요? 곧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입니다. 이것은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의 고난에 함께함으로 겪게되는 고난과 박해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함으로 박해를 겪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됨으로 겪게 되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잘못의 댓가를 대신 치르는 고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을 위한 고난, 주님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함으로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이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가시고, 사랑을 알리시고 계십니다.

서울에 가면 ‘애오개’ = ‘아현동’ 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종로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습니다. 이 동네 이름의 뜻이 참 슬픕니다. 아현이라는 말은 애오개의 한자어 표현인데, 애오개란 애고개가 변한 말이라고 합니다. 150여년전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으면 가져다가 서대문밖에 묻었는데, 무덤이 어찌나 많은지 동네 이름이 애고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매일 하천이 넘치고, 위생은 전혀 발전되어있지 않아서 아이들이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질환, 홍역,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숱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때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병원과 학교를 차리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의 아이들도 똑같이 병에 걸려서 숱하게 죽어 나갔습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 묘역이 있는데, 거기에도 아이들의 무덤이 참 많습니다. 자기 자녀가 죽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극은 누군가의 죄로 인한 비극도 아니요, 선교를 잘 해내기 위한 희생으로서의 비극도 아니요, 오직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사랑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맞이하게 된 고난과 슬픔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슬픔 위에 피어난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미리 축복하셨습니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람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손해보는 길, 바보같은 길이지만, 주님의 눈으로 볼때에는 이것이야 말로 복된 길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길입니다. 이 길에 함께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