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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법 (2020.02.16. 주일예배)

마태복음 5장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산상 수훈의 팔복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이 팔복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라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복을 나누었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사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파산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없이는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애통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와 부조리와 죽음이 우리 삶의 현실임을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누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진실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위로와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상처와 아픔과 문제와 죄악들을 내어드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스림과 위로하심 치유하심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복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세 번째부터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주님 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5절 말씀입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주시는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하다. 영어로는 젠틀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을 우리는 온유하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온유하다는 것을 크게 두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불의하게 대했을 때, 악하게 대했을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핍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고, 선을 위한 길이라도 악한 방법으로 하지 않는 것 그것을 온유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죠, 호의가 계속되면 사람들이 그걸 권리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우리 사회는 자기 권리를 잘 찾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차원을 한단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손해만 보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지혜로 악을 선으로 바꾸어내는 삶, 모두가 자기의 권리만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그것보다 훨씬 더 고귀한 차원, 희생과 헌신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잘먹고 잘사는 차원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러운 것이요, 죽으면 딱딱해진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맹장, 지장, 덕장) 온유함은 하나님이 주신 지경을 넓히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으며 이 놀라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온유함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열려있는 태도로 다른 이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늘 관용과 포용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방법이 온유하지 못하면 오히려 좋은 목적을 망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11장 29절에서 당신을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온유함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 온유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온유함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넓혀가실 것입니다

다음은 6절 말씀입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때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붙잡고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고 생활에 치여 살아가다보면 ‘정의’라는 단어가 참 우리 인생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의’만큼 우리를 굳게 세우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산다고 할 때 우리는 새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옳은 일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사는 것에만 마음을 쓰는 것에서 벗어나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주님과 더불어 옳은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할 때 그 의는 무엇일까요?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지켜야할 윤리입니다. 나는 정직한 삶을 사는가, 나는 거룩한 삶을 사는가,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가 등등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야할 정의입니다. 정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입속에, 나의 눈속에, 나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나의 손과 발에 붙어있습니다. 둘째로 사회 구조적 정의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사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주인이시오, 교회의 주인이신 동시에,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바로서길 원하십니다. 온갖 폭력과 부정, 불의, 탐욕, 거짓, 억압, 슬픔과 절망이 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통해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주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부활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땅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셨으며, 진정한 소망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앞서 말씀 드린 모든 윤리와 모든 변혁의 뿌리이자 완성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주님의 사랑안에서 진정으로 변화시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의를 찾고 갈구하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 배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의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긍휼의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내 앞의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나의 관점, 내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과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제일 먼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저 사람과 나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요, 나는 나다.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심지어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가 어찌되든 상관없다, 심지어 그를 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은 곧바로 하와를 비난했습니다. 하와는 뱀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아들이었던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동생 아벨을 죽여버렸습니다. 이후 성경은, 나아가 우리 역사는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로 가득합니다. 제가 역사를 좋아해서 만화로 된 세계사 책이 있는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면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지극히 사랑하시는구나, 내 곁에 있는 이 사람도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구나.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내가 주님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구나,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구나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가장 작은 사람에게 준 냉수 한그릇이 바로 주님을 대접한 것이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곳에 새겨넣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의 마음이 주님 안에서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긍휼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아픔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가장 작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부터 사회 전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은 상태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던 왕이었지만, 큰 죄악을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을 보고 반하여, 유부녀였던 그녀를 범했을 뿐 아니라 그의 남편까지 죽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강한 책망을 받고, 그는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시편 51편 9~10절 말씀은 그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는 자신의 죄악을 깊이 회개하면서, 다시금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 기도하였습니다. 깨끗한 마음, 청결한 마음이란 주님께 용서받은 마음, 그리하여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이라는 것을 시편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의 삶과 마음을 늘 주님께로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맘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지막 복은 화평입니다. 다같이 9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사랑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드러냄으로 세상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살아온 환경, 처해진 상황, 사람마다의 성향, 가치관들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결혼해서 살면 배우자를 통해서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아 사람 참 다르다. 설령 생각하는 것이 같다 해도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표현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듣지 않으면 특히 넘겨 짚으면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가운데 갈등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한 사람 한사람 관계도 어려운데, 집단으로 얽히면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집단과 집단이 갈등하고, 그 갈등이 심지어 전쟁이 되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뉴스만 틀면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기의 수많은 죄악들과 갈등들이 무엇때문인가? 바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판단한다는 데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을 줄이고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은 자기를 죽이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헤아리려고 애쓰는 것, 그사람이 하는 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상황까지 같이 읽어주는 것,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사랑으로 메꿔주는 것, 그래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거야 생각하며 기다려주는 것, 손해보고 희생해주는 것, 서로가 용납하고 용서하면서 품어주는 것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모든 순간에 잘잘못을 가리신다면, 우리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다려주시고 용납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도 주님이 내게 대해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우리 공동체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떠올릴 것이요,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야기할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선포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는 태초로부터 계획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고, 선을 행하되 악한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넓혀갈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그것은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윤리적 차원, 사회 구조적인 차원, 무엇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주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것은 주님의 눈으로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 같이 내 이웃도 지극히 사랑하심을 깨닫고 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 그것은 주님의 용서하심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용서함 받은 사람만이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화평한 사람,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에 새로운 길을 희생과 헌신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받은 은혜를 깊이 깨닫고, 이러한 삶을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