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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애통한 우리들 (2020.02.09.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5장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 무엇인지를 그분의 가르치심과 치유하심과 전파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모든 방식을 떠나 새로운 삶의 방식,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들, 특별히 제자들에게 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로 결심한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무엇을 뜻하고, 우리가 이제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으로 5장, 6장, 7장 총 3장에 걸쳐 대장정이 펼쳐집니다. 이 세 장을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하여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들은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친 말씀입니다. 정말 주옥같은 주님의 말씀이 아로 새겨져 있습니다. 앞으로 주일마다 함께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와 가르침을 배우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1절 2절은 이 산상 수훈의 첫 시작을 보여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산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서 예수님 주변에 앉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을 나누셨다는 것은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우선적으로 소수의 사람들과 나누려 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막지 않으셨지만,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결단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로 돌이킨 사람, 복음을 듣기로 결단한 사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앞에 앉아서 차근차근 말씀해주신다 생각하며 말씀을 경청합시다.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소위 8복이라 불리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무엇 무엇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총 여덟 번의 복이 선포되어 보통 8복이라 불려왔습니다. 이 말씀을 총 세 번에 걸쳐서 나누려고 하는데, 오늘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말씀 3절과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오늘 말씀을 함께 읽고 딱 드는 느낌이 어떠셨나요? 여러 가지 느낌이 있으셨을 줄 압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나? 정말 애통한 사람이 복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삶은 너무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생각도 드셨을 것입니다. 정말 그 길이 복이 있는 길이라면 천국을 위해서 내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나? 내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가난한 사람이 되고, 애통하는 사람이 될 자신이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드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이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주시려고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시는 분이신가? 우리를 위로시켜주시려고 우리를 애통하게 만드시는 분이신가? 혹시 이래서 내가 계속 삶이 힘들고 어려운 가? 이거 예수님 믿었다가 삶이 훨씬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오늘은 결론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실은 너희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야’, 
‘사실은 너희가 애통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복을 있는 이들은 바로 너희들이야’
‘천국이 너희의 것이요, 위로가 너희의 것이야’

심령이 가난하다, 애통하다. 

이러한 말들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비참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기준에 상대적으로 더 불쌍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애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 큰 병에 걸린 사람, 가난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 사회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삶의 고통이 깊어질 때에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이러한 고통과 비참함으로 일부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됩니다. 천국과 위로는 결국 이러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천국과 위로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중세 때에는 이렇게 팔복을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고통과 고행의 길로 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할때에 고통과 고난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천국과 위로를 구하려하지 않든지 둘중 하나로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더 깊게 애통하고, 자신의 가난함을 쉽게 직면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먼저 시작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고난과 고통이 복의 통로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상대적인 가난과 상대적인 애통으로 접근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선으로 접근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심령이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구나, 내가 진실로 애통한 있는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은 ‘프토코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 입니다. 이 단어는 프토세인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굽실거리다. 움츠리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생존을 위해 굽실거리고 구걸하고 움츠려있는 상태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완전히 파산한 상태,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가 바로 프토코스 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영혼이 사실은완전히 파산했다는 것,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을 때 그것을 느끼지 못할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졌을 때 그것을 조금 쉽게 느낄 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애통한 자’에서 애통은 ‘펜툰타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마음이 상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단어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마음이 상한 자, 자신의 죄와 한계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상한 자,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상한 자, 곁에 있는 이웃과 자신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마음이 상한 자를 뜻하는 단어라 설명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애통한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나요, 우리 중 누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 중 누가 내 삶에는 고통이 없고, 내 이웃에는 고통이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과 현실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상한 자, 애통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추운날 밖에서 밤을 지내게 될 때에, 어느 순간 몸이 따뜻해지고 잠이 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 체온이 내려가 위험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몸이 느끼기엔 오히려 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잠들면 사람은 얼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 애통과는 관계 없는 사람이라 느끼게 됩니다. 주님 앞에 다가갈수록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지고, 민감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뜻한 목소리를 건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사람아, 너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야. 그러니 애써 부유한 척 하지 않아도 돼. 사랑하는 내 사람아 너는 마음이 상해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 않아도 돼. 하나님의 나라는 네 모습 있는 그대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야. 네가 가진 모든 아픔, 상처, 주님을 향한 갈망, 눈물과 소망을 있는 그대로 가져와도 돼. 네가 어떠한 모습이든, 네가 어떠한 상황이든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기 위해서 내가 너를 찾아온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너희여, 이제 복이 너희에게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현재형 동사 에스틴을 사용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인 것을 내가 잘 안다.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다. 이제 너는 복을 받았다. 마치 눈이 멀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눈을 떴던 것처럼, 마치 몸이 굳은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부정한 사람으로 버림받았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깨끗해졌던 것처럼, 주님이 필요했던 너희 앞에 내가 있으니, 너희는 이제 복을 받았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도우심과 영광이 네 삶에 가득해졌다 선포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애통해하고 있는 너희여, 이제 복이 너희에게 있다. 네 삶에서 너를 집어삼켰던 죽음과 너의 영혼을 갉아 먹었던 죄, 온갖 세상의 불의와 너와 너의 이웃을 아프게 했던 고통으로 상했던 너의 마음이 이제 내 안에서 위로함을 받고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다. 나의 구원이 너를 건져낼 것이요, 너는 이제 영생의 삶을 선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 삶에서 일하기 시작할 것이요, 내가 네가 사는 세상에서 일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고 이 세상을 책임질 것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주님의 선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먼저는 내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나에게 복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위로하심과 치유하심, 구원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마카리오이’ 입니다. 히브리어의 ‘아쉐레’에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심오한 기쁨을 가리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셨음을 느끼고,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에서 일하심을 느끼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가장 처음, 우리들의 상태를 진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위로와 구원을 받았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열쇠입니다. 그 안에 충만한 복이 있고, 놀라운 기쁨이 있으며,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구나, 애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복되심을 충만히 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귀한 새벽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