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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지 말아라 (2020.05.03.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6장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을 크게 둘로 분류하면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야할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난 주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율법 완성을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해서는 안되는 일들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 그 근본적인 동기를 살펴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마음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에게 음욕을 품고 싶은 마음, 자기 욕심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 맹세를 통해 장담하고 싶은 마음, 복수하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 원수를 해치고 싶은 마음 이러한 마음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번 주의 말씀은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실수를 범하는 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 그 일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어때야 하는지, 그 일이 주는 참 의미와 기쁨이 무엇인지를 나누셨습니다. 다같이 예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같이 1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건 생활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예배나 기도 생활, 또 헌금 생활, 기부, 이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꼭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꼭 지켜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행동 자체는 중요한 것이요,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그 자체를 넘어, 그 행동의 동기를 스스로 살펴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어떤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지 그 동기를 갖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동기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동기를 섣불리 지레짐작으로 말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체적으로 그 사람의 내면의 동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의 결과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좋은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의 어떠하던가에 칭송을 많이 받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그러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좋아지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 아 저 사람 신앙 좋아라고 말할 때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판단과 칭찬이 정작 그 칭찬을 받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독이 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에 매몰될 경우, 자기 자신의 내면의 동기를 마비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칭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칭찬 듣는 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칭찬을 할 때에 우리 내면의 동기를 알지 못한 채, 결과만을 놓고 칭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칭찬은 내 겉모습에 관한 칭찬일 뿐 내 내면의 깊은 마음에 관한 칭찬이 아닙니다. 이 내면의 마음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살필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마음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칭찬과 사람들의 반응에 둘러싸이면, 이처럼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살필 기회를 상실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기회를 상실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의 동기를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살피며 살펴야 하는데, 칭찬에 익숙해지면 이러한 성찰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그 일에 반응하는 자기의 겉모습만 남을 뿐, 진정한 자기 마음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아니라 보이기 위한 일이 됩니다. 내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실된 관계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할 때, 의로운 일을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은 내가 하나님의 마음과 통했다는 기쁨,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는 기쁨,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깨닫는 기쁨입니다. 그 교제 속에서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선한 일을 실천했을 때 얻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하는 일은 이러한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나의 내면과는 무관한 일, 나아가 하나님과는 무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사람들이 주는 칭찬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는 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때문에 이 기쁨을 놓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으로 그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더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구제하는 모습을 표현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 그러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진실로 안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삶은 연극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식이라는 단어는 ‘히포크리테스’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연극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마치 가면을 쓰는 것처럼 속 마음을 감추고 사는 사람, 위선적인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광대의 슬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속 마음은 아프고 힘들고 슬퍼도,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광대들의 진짜 현실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광대는 진짜 자신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광대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러한 광대와 같은 슬픔을 버텨내야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속마음은 어떠하든지 겉모습은 그럴싸하게 보이는 삶, 내 마음과 동떨어진 일들만 감당하는 삶을 우리도 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계속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는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들로만 채워지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찾아오는 것도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시 주님 앞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의무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살 때 진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인정이나 칭찬, 세상이 부여해주는 공인된 자랑거리로 지탱되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외식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가장 의로운 행위, 가장 고귀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 이유가 고작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그 실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커녕, 심지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관계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마비되고 사라진 삶,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내가 왜 이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삶, 그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철저히 의존된 삶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외식하는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내가 이렇게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사는 훌륭한 사람이야 좋아하겠지만, 사랑의 나눔이 주는 가장 핵심적인 기쁨, 곧 하나님과 합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주는 기쁨을 놓쳐버렸습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는 이처럼 서로간의 인정과 칭찬으로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회의 모습에 잘 적응해서 일을 많이 시키고,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을 칭찬해줌으로 교회를 이끌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자발성보다는 의무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이러한 공동체에 오래 살다보면 내 마음을 내가 잘 모르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지, 내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게 됩니다. 내 마음이 어떠한 지, 내 신앙이 어떠한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저 칭찬과 인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헌신과 실천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없이 애씀만 있는 실천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늘 두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없는 내 마음을 살피고, 그러한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내 이웃을 사랑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마음이지만 주님 주시는 마음으로 결단하여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설사 아무도 모르는 일을 실천했다 할지라도, 오로지 하나님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 때문에 아 정말 기쁘다. 아 정말 행복하다. 아 내가 진짜 살아있는 것 같다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갚으심은 바로 이러한 기쁨입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사랑을 결단하고, 하나님 때문에 나누기로 결단하고, 하나님 때문에 헌신을 결단할 때의 기쁨, 하나님을 아는 기쁨 그것이 주님이 갚아주시는 기쁨입니다.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새벽교회 성도님들이 이 하나님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구제하고 봉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이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와 찬양을 통해 마음을 찾고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5~8절까지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구제를 넘어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조금 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경건생활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연극에 중독된 사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중독된 사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진 사람은 기도 마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가장 내밀한 사랑의 교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핵심이자 전부인 기도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연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진실한 관계는 둘만의 비밀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둘만의 이야기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둘만의 이야기 속에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둘만의 이야기가 폭로될 때, 누군가에게 자랑으로 이용당할 때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 모욕을 느끼고, 관계는 무너집니다. 기도를 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자랑하려고 한다면, 그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진심을 담은 편지를 봉투에 넣지 않고 누구나 보이게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큰 기쁨이요, 행복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기도 가운데에서 주님의 위로하심과 만져주심을 깨닫고,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외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기도의 참된 기쁨과 은혜는 누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라는 기도의 껍데기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으나, 실제는 하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기도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상, 곧 주님을 경험하는 은혜는 받지 못하고, 엉뚱한 상, 사람들이 주는 상을 얻어갔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여라. 기도를 할 때에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라. 기도를 할 때에 중언부언 하지말아라. 기도는 네가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한 주문이 아니다. 기도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한 종교 의식도 아니다. 기도는 너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마음을 경험하는 놀라운 자리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주님께서는 그 은혜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경건생활을 우리의 마음가는데로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의 만남 시간을 갖고,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늘 우리는 경건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 분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얻고도 하나님을 잃으면, 그 일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구제와 기도를 포함하여 여러 경건생활이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이길 수는 없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은 거꾸로 이 기쁨을 놓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많은 종교인들이 교만과 자랑을 위해, 의무감에 경건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허망함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것,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그 분 자체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