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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상전 (2020.06.12. 금요기도회 설교)

 

에베소서 6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오늘 말씀은 빛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나누는 말씀 시리즈의 세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지지난주 말씀을 통해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종과 상전의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이 선포되었던 2000년전에는 그리스 로마세계의 3분의 1이 노예일만큼 노예가 흔했습니다. 이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모든 일상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러한 노예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부 관계, 부자 관계, 그리고 노예와 종의 관계를 통해 실제적으로 가장 가깝게 만나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함께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를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혹시 성도 여러분들 중, 아 성경이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있구나. 이제 다시 노예제도를 회복해야겠어.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지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중 누구도 노예제도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말씀은 오랜 기간 노예제도가 성경적이라는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100년전, 200년전 미국에서는 이 말씀을 바탕으로 교회가 노예제도를 적극 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말씀을 왜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수준이 그 시절에 비해 훨씬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면 안된다는 생각,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귀하다는 생각, 노예 제도는 악하다는 생각, 사람을 돈을 주고 사고 팔거나, 사람을 동물처럼 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 생각에 이미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우리의 바탕이 되니, 오늘 말씀도 예전 사람과는 달리 새롭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마치 똑같은 글을 읽어도 5살 아이가 느끼는 마음, 15살 소년 소녀가 느끼는 마음, 25살 청년이 느끼는 마음, 50살 중년이 느끼는 마음, 75살 어르신이 느끼는 마음이 다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자랄수록 우리는 새로운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말씀과 우리는 늘 새로운 소통과 교제를 해왔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일하십니다. 사람의 성장과 성숙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시대의 영향을 받고, 살고있는 지역의 영향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감동을 주시면서 인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켜 오셨습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서, 말씀은 우리에게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딱딱하고 굳은 규칙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때마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단순히 노예에게, 그리고 노예를 다스리는 주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노예가 아니며,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단순히 직원과 사장, 또는 직장 선임과 후임,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업주와 손님의 관계로 바로 적용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계약 관계는 노예와 주인의 종속관계와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인간관계의 핵심 정신을 살피고 그 정신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5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바울 사도는 먼저 종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상전을 대할 때에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하십시오. 오랫동안 이 말씀은 노예들을 훈계하는 그의 주인들이 사용했던 말씀이었습니다. 노예가 두려워 떠는 것, 성실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노예에게 채찍질을 하며 이 말씀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노예 주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노예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노예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감당하되 지금 너희가 섬기고 있는 주인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대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네가 가진 고귀함을 보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요, 세상의 악한 구조가 너의 마음 속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지켜내는 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육체의 상전은 누구일까요? 저는 우리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모든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노예는 그의 삶이 오직 주인에게 달려 있지만, 오늘날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사람들을 육체의 상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직장에 있다면, 당연히 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사장님, 이 회사를 망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직원들, 회사에 일을 맡기는 손님들, 일들이 잘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협력업체들 이 모든 사람들이 때때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상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싼값에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수고하는 농부들, 상인들, 서비스 해주는 직원들 이러한 사람들도 때때로 우리의 상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를 돕는 가족들과 친구들도 때때로 우리의 상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도움과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하루 하루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전에 순종하고, 상전을 그리스도처럼 여기는 것의 참 뜻은 이처럼 일상 속에서 우리를 돕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와 같이 귀히 여기고 감사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존경하는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진실되게 나아갈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유퀴즈, 정말 평범한 정육점, 연매출 4000, 한때 강북 전체를 커버, 우래옥, 하동관, 청와대 고급식당 1원칙 늘 양심을 지킬 것 5~10년 되어야만, 정성을 기울이면 500km, 1시간 30)

 

6, 7, 8절 말씀은 계속해서 종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노예근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주체성 없이 남의 눈치만 보는 것을 뜻한다. 말 그대로 자유가 주어졌거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국 노예 상태에 만족하는 정신 또는 근성이다. 노예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 일만 하면 될 뿐입니다. 목표와 목적이 없으니 노예가 신경쓰는 것은 그저 오늘 하루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때울것인가 입니다. 노예는 더 열심히 일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최대한 자기 몸 편하면 되는 것이요, 그저 주인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만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 근성이 배이게 되면 자발성, 주체성은 사라지고, 게으름과 무기력함이 가득차게 되며, 자기 비하와 거짓을 서스럼 없이 저지르게 됩니다.

 

말씀은 선포합니다. 너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노예라 할지라도, 너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기에 너희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스스로 자신의 고귀함을 찾고, 스스로 네 마음 속에 있는 자유를 찾아라. 모든 일을 하되, 끌려 다니면서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진실되게 하라.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마음과 정신을 때때로 가질 때가 있습니다. 노예들처럼 삶의 목표와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의 이익과 편안함 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저 이 사람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만 따지면서 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 귀한 줄 모르고, 관계 귀한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명과 사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 또는 우리가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했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남겼느냐를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느냐? 그 가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얼마나 구했으며, 얼마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앞서 우리에게 상전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사람들이라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들을 만날 때, 그 만남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 속에서 진실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첨과 위선, 속임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관계, 진실된 거래, 진실로 다른 사람과 함께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방법대로 더 주고, 더 품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삶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선을 내 앞에 있는 그 사람 뿐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9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9절 말씀은 당시 노예의 주인들에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종에게는 4절에 걸쳐서 말씀하시고, 주인에게는 단 한절 말씀하시는 것으로 주인의 책임이 더 적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9절 상반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말씀은 선포합니다. 노예가 주인에게 대하는 모든 태도는 상전들도 노예들에게 똑같이 해야하는 태도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겸손히 여기고, 진실되고 성실하게 대하는 것,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을 섬겨주는 것, 그것은 노예가 상전에게 해야하는 태도일 뿐 아니라 상전들도 노예들에게 해야하는 태도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노예와 상전 구분 없이,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태도를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말씀은 상전에게 한 가지를 더 명령하고 있습니다. ‘위협을 그치라다른 말로 협박하지 말아라명령하십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라 가르칩니다. 그것은 옛날 유럽의 왕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아무도 그 권력에 도전해선 안된다. 모든 권력은 신성한 것이니 권력자는 언제나 옳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권력은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하여 잠시 잠깐 맡기신 것이니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용할 것을 당부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때때로 갑의 위치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권한과 힘을 절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여유를 통해 진정한 힘이 발휘됩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계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주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얼마 전 오 집사님 댁에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집사님께서 밝게 웃으시면서 좋은 고객 한분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고객은 자신이 치를 값을 정확히 치러주시고, 늘 생각하고 배려해주신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이러한 고객을 만날 때에 참 행복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값을 치른다고, 계속 말을 바꾸고, 계속 트집을 잡고 자기 권한을 끝까지 행사하려고 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끝까지 찾는 사람은 잠시 잠깐은 자기에게 유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자기도 손해를 보고 맙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식당에 가서 종업원에게 반말하지 않는 것, 손 아랫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는 것, 모든 관계에서 더 겸손하고 여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빛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빛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입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러한 삶은 첫째로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겸손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존귀히 여기는 마음,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루하루의 삶을 귀히 여기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인생을 진실 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가진 권한을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는 삶입니다. 내 앞에 있는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마음을 기억하며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 닮아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서 예수 향기를 느끼고, 우리의 삶은 주님 주시는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삶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