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2020.07.10. 금요기도회 설교)

 

디모데전서 1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지난 주까지 우리는 에베소서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지극히 사랑했던 교회, 3년 가까이 머물며 혼심의 힘을 다하여 목회하며 섬겼던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복음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나눈 뒤에 이번주부터 어떤 말씀을 나누어야 할지 여러 갈래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신약을 했으니 구약을 해볼까 생각했고, 성경을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언서들을 한 번도 나누지 못해서 예언서를 해볼까 고민했습니다. 또한 동시에 새벽 예배 때에 구약을 하고 있으니 신약 성경 중에서도 해볼수 있지 않을까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을 균형있게 성장시키고, 우리가 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디모데전서가 떠올랐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과 같이 여겼던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터키 중부)의 루스드라 출신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는 그리스계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양육했으며, 외할머니 로이스도 디모데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말씀 곧 구약성경을 잘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 방문했을 때에 그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였고, 바울은 이를 귀하게 여기고 그를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바울의 사역을 계승하고 이어갈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미처 가보지 못하는 교회들에게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고린도, 빌립보 등에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그곳으로 담대하게 달려갔으며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바울의 사역을 이어갈 복음의 전달자로 굳게 믿었습니다.

 

지난 주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여를 사역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두란노 학당을 만들고 밤낮으로 수고하여 말씀을 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양육하여 참 그리스도인으로 세워갔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바울의 헌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귀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며 이 교회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 지역의 특성이 바울을 더욱 염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029~3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난 주에도 읽었던 말씀입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에베소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사상이 전파되고 여러 생각들이 오가던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단과 거짓 가르침도 기승을 부리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떠난 뒤에 아직 어린 이 에베소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왜곡하고 말씀을 잘 못 가르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 생명과 자유와 기쁨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거짓 지도자들의 권세를 위한 복음을 가르칠까 두려웠습니다. 바른 복음, 좋은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자유롭게 합니다. 말씀 가운데 거할수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바라보게 합니다. 평안과 감사가 마음에 들어오고, 기쁨 가운데에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짓 가르침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쫓기는 마음, 경쟁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이 자라게 합니다. 이러한 마음 안에서 영적 지도자를 우상으로 여기고, 자기 집단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 영적인 어그러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히 복음을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게 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동역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동역자,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져 있는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로 불렀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잘 이어 계승할 수 있는 디모데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디모데에게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가 바로 오늘 디모데 전서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에베소서였다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우리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 말씀들을 함께 본다면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절과 2절 말씀은 편지에 쓰는 첫인사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에베소서와 비슷합니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인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내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바울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십니다. 예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소망되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소망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용서가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참된 승리를 보여주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림이 우리의 소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재림이 우리의 소망됩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온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 하나님, 그 예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과 소망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받는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참된 믿음의 아들이라 소개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한 것도, 믿음 안에서 양육한 것도, 어엿한 동역자로 세운 것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받은 사명, 그 사명을 디모데에게 오롯이 전하였습니다. 그저 지식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함께 전하였기에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울은 첫 인사를 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너에게 전합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바꾸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사랑, 평화가 디모데에게 있기를 전합니다. 예수 복음을 아는 사람,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이 누리게 되는 삶은 다름 아닌 은혜와 사랑과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그 믿음의 열매를 전합니다. 주님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을 알게 된 사람이 자연스럽게 누리게 되는 삶입니다.

 

이제 인사를 마친 바울은 본격적으로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말씀을 전합니다. 바로 바울이 가장 염려하고 있던 것, 거짓 가르침을 경계할 것을 선포합니다. 3, 4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바울의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바울이 경계한 것은 영지주의율법주의입니다. 이 두 사상의 특징은 복음보다는 종교적인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함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에 매일 나와서 3시간씩 기도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꺼려하겠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하며 권면하면 마음이 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도 하지 않고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그 정도 노력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3시간, 5시간, 10시간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그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10시간 기도하는 사람, 5시간 기도하는 사람, 1시간 기도하는 사람, 소위 영적 계급이 생기는 것입니다. 10시간 기도하는 사람이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고, 더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적게 기도하는 사람은 점점 무시당하고, 마음에 불안을 갖게 되고, 공동체는 계급이 생기게 됩니다. 종교적 열심히 있는 사람은 보상을 받고, 종교적 열심히 없는 사람은 무시를 당하게 되는 일종의 종교 다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종교 지도자가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종교가 이렇게 되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 매우 많았습니다. 열심과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이 종교를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적 체험이나 감정을 경험하면 이러한 경향은 더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나 묘하게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말씀을 왜곡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자기의 깊은 죄와 한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수록 사람은 겸손해지고,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크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다른 이웃을 더욱 섬기고, 사랑하고, 품고 용납하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신 은혜에 기쁨을 누리고,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을 조심하라. 신화와 족보 이야기를 조심하라. 율법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계속 의무를 던져주고, 그 의무를 통해 구원을 찾으라는 말씀을 경계하라. 마치 어떤 특별한 지혜나 신비적인 체험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라. 바울은 율법을 통해 종교적인 길로 빠져나가는 함정을 조심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는 것, 우리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전적이 주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은혜에 따라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진실된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을 붙잡도록 성도들을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종교 생활을 잘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은혜를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마저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 지혜, 섬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죄인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그래서 늘 감격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나를 이토록 사랑해주시는 구나 고백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섬김 앞에서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계속해서 낮아지지만 더더욱 존귀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기꺼이 주님 따라 사랑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바울은 8~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율법의 참된 사용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할 뿐,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율법을 바라보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율법을 보는 것과 사랑을 위해 율법을 보는 것은 그 열매가 다릅니다. 바울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바른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예수님 믿는 것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그 선물을 깨닫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죄악된 사람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얼마나 은혜 가운데 서 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자리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가장 깊은 감격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우리 성도님들이 들어오셔서 이 놀라운 복음의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