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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긍휼을 입는 것 (2020.07.17. 금요기도회 설교)

 

디모데전서 1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은 디모데 전서 두 번째 말씀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왜 편지를 보냈는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바울은 에베소에서 오랬동안 사역을 한 후에, 그곳을 떠나면서 자신의 가장 믿을만한 동역자 디모데를 새로운 사역자로 세웠습니다.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말씀 교육을 잘 받고 자란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가족을 전도하였고,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양육되었고 장성하여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말씀으로 세워나간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 복음과 말씀 위에서 그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줄 디모데를 세운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세운 동역자 디모데에게 그의 사역과 신앙을 돕기 위해 보낸 편지가 디모데전후서입니다. 디모데서를 통해 사역을 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역을 어떻게 굳게 세워 나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디모데를 위한 편지이면서 동시에 에베소 교회를 위한 편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복음 위에서 든든히 세우는 귀한 말씀이 됩니다. 에베소서와 더불어 디모데서를 함께 읽으며 우리는 복음을 깊이 깨달아 우리의 신앙을 세우며, 굳건한 신앙인이 되어갈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은 특별히 다른 복음을 조심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에베소 도시는 번성한 무역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다 보니 다양한 사상과 철학이 오고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잘못된 생각과 말씀 해석 또한 쉽게 에베소 교회를 흔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행하였던 영지주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복음을 왜곡한 율법주의가 쉽게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구원에도 자격이 필요하고,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종교생활의 의무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엘리트주의를 만들고, 잘못된 권위주의를 만들고, 교만과 정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사상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든든히 세울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에 이어 오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교리를 전하는 것도 좋고, 교회가 좋다는 것을 전하는 것도 좋고, 친분으로 설득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으로 얻은 기쁨, 그 감격, 그 복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맛집을 소개할때도 내가 그거 먹어보니 진짜 맛있더라 소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 믿은 이유를, 구체적인 삶의 여정과 더불어 나눈다면 그것만큰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잘못된 사상과 말씀 해석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을 디모데에게, 나아가 에베소 교회에 설명한 것입니다.

 

잠시 바울의 인생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엘리트였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지역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로마제국이 보호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젊은 시절 예루살렘에 들어가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 밑에서 율법공부를 하였습니다. 집안에서 그를 유학시켜줄만큼 유복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바리새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성경에도 능통했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확고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엘리트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뒤집어집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능통했던 바리새인 바울은 예수님의 처형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도 범하였고, 성전도 모욕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여 하나님도 모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명기 2122~23절 말씀에 이와같이 말씀합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자다. 대표적으로 에스더 말씀의 하만이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만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말씀과 성전과 하나님을 모욕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확고한 신념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맞아 죽을 때, 바울은 그를 죽이는 사람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광채로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저 환상이나 영적 경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거룩한 육체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포가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야 했습니다. 바울은 3년여를 아라비아 반도에서 지내며 자신이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또 말씀을 묵상하며 완전히 회심하였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바울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35, 6절에서 선포한 메시아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나아가 그는 이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구약성경의 말씀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고, 큰 교만함 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때리고, 가두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교만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도 알지 못한채 하나님을 완전히 반대하는 죄인의 삶을 산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자기를 용서하시고 품으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죄인, 마땅히 심판의 맨 앞자리에서 서야할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서는 품어주시고, 용서하시고, 나아가 그의 사도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무한한 사랑, 이 무한한 용서, 이 무한한 은혜가 바로 복음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반역한 인간, 교만하고 불순종하고 불신앙 가운데 있는 인간을 당신께서 고난받으심으로 다시 주님의 품으로 받아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마저도 자기를 높이는 교만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그 순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달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바울의 심정이 절절히 들어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한번 봉독하겠습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먼저 감사를 고백합니다.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를 충성되게 여겨주시고, 사도의 직분을 맡겨주신 분이 다름아닌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합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고 모욕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폭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을 때에 했던 그 행동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저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죄를 사랑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이 믿을만한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중의 괴수, 가장 큰 죄인이었던 제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죄인이었던 저에게 큰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 깊은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본보기를 먼저 저에게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죄인된 모습과 그러한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를 동시에 고백함으로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에게 복음 그 자체로 선물이요, 은혜요, 감격과 감사요, 놀라운 기쁨의 소식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놀라운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렇게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서 들어날까요? 복음은 지혜와 지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자랑과 성공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품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교만함과 죄악된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 성령님의 충만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이러한 바울의 인생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디모데에게 다시한번 상기시킴으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깨닫게 했습니다. 자기 힘과 지혜로 구원을 찾으려 하는 영지주의, 율법주의는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리는 것이다. 오직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라. 그것이 복음이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과 참 많이 맞닿아 있어서 함께 보고자 합니다.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오늘 말씀처럼,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을 잘 받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이시간 기도할때에 이러한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도록, 우리 가정 가운데 충만하도록, 우리 사업 가운데 충만하도록, 우리 교회 가운데 충만하도록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