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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어주는 사람 (2020.09.25. 금요기도회 설교)

 

룻기 1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치고 겹쳐서 도저히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 어려움을 뚫고 가야할지 몰라 막막한 어려움에 깊은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분들은 그러한 암담한 시절을 지낸 경험이 있으신지요?

 

이제 우리가 함께 읽게 될 룻기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픔과 힘듦과 절망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룻기는 우리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웃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러한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같이 1, 2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구약에서 사사시대는 가장 비극적이고 죄악이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사사기도 저희가 언젠가 함께 나누겠지만, 이 시기는 한마디로 이 없어서 자기 소견이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여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던 시대였습니다. 사사시대가 배경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들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룻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룐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베들레헴은 가장 참혹한 범죄와 연관된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17, 19장에 나타난 참혹한 일들은 모두 베들레헴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 행음, 살인과 같은 인간의 죄악들이 번성하던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공간적 배경 위에서 이들이 맞이한 것은 흉년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가장 거친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근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흉년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큰 비극과 가장 큰 심판이 교차되는 자리에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길은 나그네의 길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그네의 삶도 참 힘듭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나그네의 삶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시대 사람들은 각 지역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지켜주었던 신을 떠나는 것이라 믿었고,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겪은 어려움이 너무 컸기에 이들은 이러한 비난과 두려움을 감수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북한에서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시리아에서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미얀마에서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자기 지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극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새로운 땅에서 맞이한 것은 더욱 큰 비극이었습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새로운 땅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은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노심초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다가 육체가 쇠잔해지고 삶에 지쳐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 같습니다. 남편과 함께 타지에 갔던 나오미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에게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어느정도 적응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으로 이주한지 10년이 되던 해에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죽은 것을 보니 사고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두 아들의 죽음은 나오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처음 베들레헴에서 함께 나왔던 가족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일 것입니다.

 

이 비극은 감정적인 슬픔을 넘어서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과부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구걸밖에 없었습니다. 과부 셋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비참한 삶을 의미하였습니다. 나오미는 당장 삶을 꾸리는 것 자체를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가 말 그대로 굶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에 고향 이스라엘로부터 실낱같은 소망을 주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기근과 흉년으로 고통받던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이곳에서 쓸쓸하게 굶어 죽느니 차라리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구걸이라도 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습니다. 시인 김준태의 '고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고향에선/ 눈 감고 뛰어도/ 자빠지거나 넘어질 땐/ 흙과 풀이 안아준다." 나오미는 무너진 마음, 절망적인 마음을 그나마 고향에서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죽어도 거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나오미의 마음 속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룻과 오르바 두 며느리의 존재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이 자기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두 며느리는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똑같이 굶주리게 될지라도 자신은 고향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지만, 며느리들은 거꾸로 굶주림과 외로움을 동시에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자기가 지금껏 겪었던 그 힘든 삶을 며느리에게 줄 수 없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간청했습니다. 보통 말씀에서 친정을 이야기 할 때에는 아버지의 집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특별히 친정을 어머니의 집을 이야기함으로 자신을 어머니로 대해주었던 이들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제껏 이들이 진실된 마음으로 어머니처럼 대해주었으니, 이제 친정 어머니에게 가서 딸로서 위로를 받을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지금껏 동행해준 것을 깊이 감사하며 축복하였습니다. 나오미는 8절에서 이와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선대의 뜻은 선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자비', '인자', '은혜', '긍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한 사랑을 표현할 때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며느리들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나오미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좋았을 때나, 나빴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흔들리지 않고, 의리를 지키며, 마음을 담아 충실하게 나오미와 모든 대한 것입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나오미를 위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의 사랑과 위로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모두 죽은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나오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를 기억하며 며느리들을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비천한 나를 사랑해 준 것을 기억하고, 너희의 삶을 축복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의 자신을 위해 삶을 살아라. 간청한 것입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는 며느리들을 향한 나오미의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나오미는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나를 떠나서 각기 새로운 가정을 꾸려라. 그리고 그 가정에서 위로를 받아라.”

 

며느리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희도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에 가겠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말합니다.

"돌아가라.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섬김과 사랑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이들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길이라 믿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이들은 서로를 생각하였고, 놀랍게도 자기를 철저히 내려놓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펑펑 울면서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오미의 간절한 부탁에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친정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쩜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며느리 룻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은 삶 전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고, 알지 못하는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러한 선택을 결정하였습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선택을 한 룻에게 다시 한 번 타일렀습니다.

 

보아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나오미는 자기를 따라오는 길이 얼마나 힘든일인지를 알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돌이키려 한 것입니다. 그때에 룻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룻기의 암송 구절이기도 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이 이처럼 어머니 나오미를 따르기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히브리에 헤세드입니다. 인자한 마음, 자애로운 마음, 충실한 마음, 은혜로운 마음 이러한 마음이 룻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룻의 이름의 뜻은 친구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안에서 분명히 일하셨습니다. 어떻게 일하셨을까요? 친구의 사랑의 통해 일하셨습니다. 애통해하고 무너진 사람을 위해 충실하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에서 일하는 분명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보여준 룻은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족보에 그녀의 이름이 영롱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나오미처럼 인생의 어둠과 절망 속에서 삶 그 자체가 고통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친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참 좋은 친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십니다. 나오미와 끝까지 함께한 룻처럼, 우리의 삶에 끝까지 함께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을 대리하여 이 땅 가운데 신앙의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내 곁에있는 믿음의 친구가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사랑의 교제, 나눔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내가 먼저 내 이웃에게 이러한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원한 친구인 예수님으로부터 헤세드, 곧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러한 친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먼저는 우리 곁에 있는 가족, 또 교회의 동역자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실한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또 나아가서 여전히 이 땅 가운데 나오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지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귀한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