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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소망 (2020.10.02. 금요기도회 설교)

룻기 1장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기 2장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 이어서 룻기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합니다.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던 죄악의 시대였습니다. 죄가 가득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가득하고, 불의가 가득한 분위기에서 그 삶이 평온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베들레헴은 작은 도시였지만, 이러한 죄악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들레헴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엘레멜렉과 나오미는 생존을 위해 베들레헴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모압 땅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았습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종교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하루하루를 고군분투 하였습니다. 그러나 낯선 나라에서의 고된 삶은 엘리멜렉의 건강을 망가뜨렸습니다. 그곳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과부가 된 나오미는 가까스로 그곳에서의 삶을 버텨 두 아들을 결혼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더 큰 절망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두 아들이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오미에게는 이제 어떤 소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각각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와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느껴지지 않았고,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과 깊은 슬픔 뿐이었습니다.

당장 나오미는 하루 하루의 삶을 사는 것이 버거웠습니다. 당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걸과 몸을 파는 일 뿐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의 미래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의 기근이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돌아가면 먹을 음식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구걸을 해도 고향에서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 며느리였습니다. 나오미는 이 두 며느리가 각자 친정에 돌아가 각각 재혼하길 원했습니다. 이 시대에 과부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충분히 젊은 며느리들이 과부로 남을 평생을 보내는 것은 저주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들은 모압 여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살게된다면 한평생 이방인으로서 자기가 겪었던 수모를 이제 이 며느리들이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나오미는 두차례나 며느리들에게 돌아갈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습니다.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이러한 나오미의 권유를 듣고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첫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어머니의 권유를 거부하였습니다. 끝까지 어머니와 함께할 것을 고집하며, 어머니의 하나님과 백성까지도 내가 받아들이겠다 선언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의 굳은 결심을 결국 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 이 지극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나오미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룻이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룻의 이름의 뜻은 친구입니다. 친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의 선물입니다. 

이제 나오미와 룻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갈 때엔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돌아갑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는 고향땅을 떠날 때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떠났어도, 돌아올 때엔 잘되고 성공해서 돌아가는 이야기 입니다.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집을 떠날 때 소판돈 70원을 훔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장남으로 농사짓기를 원했지만 그는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니다. 그는 훗날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무려 1001마리의 소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때에는 이와 같이 성공해서 자랑스럽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서 모압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모압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바닥까지 내려갔고, 더 이상 생존하기조차 힘들어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왔던 베들레헴은 오히려 기근과 흉년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전에 함께 고생했던 친구들은 이제 넉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만 비참한 모습이 되어서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의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말씀 19절에서 2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온 베들레헴이 수군거렸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동네가 작아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왔대. 나오미 남편은 죽었대, 두 아들도 모두 죽었대, 이방 며느리와 돌아왔대. 나오미가 완전 빈털럴이가 되었대, 힘들다고 고향을 떠나더니 잘 되었다. 아이고 그러지마, 얼마나 힘들었겠어 잘 받아줘야지. 그러나저러나 그 며느리가 참 대단하다. 남편도 없는데 시어머니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고? 이러한 이야기가 삽시간에 베들레헴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나오미에게 다가갔고, 나오미에게 네가 정말 나오미가 맞느냐 물어보았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한 나오미의 얼굴은 크게 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몰라보게 달라진 나오미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 반, 놀란 마음 반으로 나오미가 맞는 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제부터는 저를 마라라고 불러주세요.”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스스로 보기에 자기 자신의 삶 속에 도저히 기쁨이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오미는 자기를 마라, 곧 괴로움이라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이라 불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심정, 차라리 괴로움이라 불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심정이 바로 나오미의 마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떠날 때엔 풍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저의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비통한 심정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바닥을 경험합니다. 때때로 그 바닥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해석은 엘레멜렉과 나오미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모압으로 떠났기에 이러한 고난을 겪었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그저 이방으로 떠난 삶에 대한 비판이라면 아마 이방 여인이었던 ‘룻’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룻기의 말씀이 오히려 생존을 위해 자기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 자기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생의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나오미의 부모님은 나오미가 한평생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평생 슬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제 인생에는 언제 기쁨이 찾아옵니까? 애통하며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 않으시구나, 내 인생에는 기쁨이 없구나, 몇 번을 기대했다가 절망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자기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룻기는 이러한 바닥을 찍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베들레헴의 뜻은 빵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 배부름과 풍성함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기근과 흉년이 닥쳤습니다. 빵이 있어야 할 땅에 먹을 것이 없는 비참한 현실이 닥쳤던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나오미는 빵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깊은 슬픔과 고난의 날들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으로 다시 빵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리 추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빵집에 다시 빵이 구워질 수 있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새벽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깊은 밤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2장 1~3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베들레헴에 도착하지 룻은 적극적으로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위기 19장 9절 10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은 이 말씀에 따라 혹시 남겨둔 곡식이 있는지, 떨어진 이삭이 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을 위해 곡식을 남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의 이러한 애씀을 감사히 여기며 기꺼이 내 보내주었습니다. 룻은 밭에 나가 추수하는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우연히 엘리 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놀랍게도 이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위해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을뿐더러, 하나님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가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깊은 슬픔 속에 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룻을 준비하셨듯이 보아스를 준비하셨습니다. 나오미의 반전은 이제 새로운 만남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다음주에 또 진행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인생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인생길도, 우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도 간단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우리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엘리멜렉, 하나님은 우리 왕이시다 외쳐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나오미, 기뻐하자 외쳐도 우리 삶에서 기쁜일이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 고비고비 첩첩 산중일때가 있고, 깊은 우울을 벗어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힘든 길을 피해보고자 새로운 길을 선택했는데 그 길이 더 힘든 길이 될 때도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인생 가운데 그러한 순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는가? 왜 내 인생을 도와주시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이러한 질문들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가장 큰 절망 속에 있을 때, 이방 여인 며느리였던 룻이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의 빈자리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어찌보면 남이었던 룻이 채워준 것입니다. 비참함과 절망 속에서 찾아온 베들레헴은 추수를 시작하고 새로운 희망의 삶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생명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유력한 사람 보아스를 미리 예비 하셔서 이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올때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보아스를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진리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도 인생의 진리인 것입니다.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인생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겸손과 소망을 동시에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 갖추어진 삶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슬픔과 아픔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 때때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무엇으로 희망을 찾아야 할지 모를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이는 그때에도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친구 룻이 나오미 곁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그 아픔을 함께 겪어내고 계십니다. 때때로 친구를 통해, 가족을 통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위로와 사랑을 건네 주십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마치 가장 깊은 어둠 밤 끝에 새벽이 있는 것처럼, 오늘 보아스를 준비한 것처럼, 십자가 끝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고, 계획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주님의 뜻과 구원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감으로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새 힘을 얻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