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솟아날 구멍 (2013.3.22. 금요기도회 설교)

category 주일 설교 2013. 3. 22. 22:27

솟아날 구멍 (2013.3.22. 금요기도회 설교)


이사야 43장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속담으로 죽을 약 옆에 살약이 있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어도 비껴날 데가 있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라 하는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꿋꿋이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애를 써도 이 세상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덜컥 겁이 나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희망을 찾으려고 해도 점점 팍팍해지는 미래 밖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를 사실 희망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돋보적으로 1위입니다. 10만명당 26명, 2010년 기준으로 만오천명이 넘게 자살을 했습니다. 지금도 30분당 한명씩 자살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 자살율이 매우 높은데 10만명당 80명이 넘게 자살로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의 절대 빈곤률이 거의 절반가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절망이 팽배한 우리나라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리나라 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희망을 점점 더 작아집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하루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오늘 하루 잘 버텨내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평안하십니까?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우리는 막상 문제가 닥치면 막막해집니다. 당장 삶에 문제에 큰 짐이 생기면, 하나님께 원망도 생기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치나 불평도 하게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 교회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다니는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당장 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헌금 내기도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따져 묻기도 합니다. 힘들 때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것 같고, 텅텅 빈 통장은 내 손바닥에 있으니 믿음은 점점 멀어집니다. 그 자리에 불안함과 초조함, 절망감이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기도해도 들어주시는 것 같지도 않고, 신앙은 점점 심드렁해집니다. 때때로 예수님을 잘 믿었더니 병이 나았다. 부자가 되어서 성공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들로 잘 해결해 주셨다는 간증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에 서운함과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이 어려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 해보기도 하지만, 사실 답을 알길이 없습니다. 삶의 문제가 길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정부분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재정의 문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문제구나, 병을 고쳐주신다는 이야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하며 하나님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서운함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면 불신앙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애써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다고 좌절하고, 비하합니다. 낙담한채 내 인생이 뭐 그렇지 하면서 울적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몸부림치지만 일상의 무게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때 우리는 참으로 큰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곤 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라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고향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며, 그들은 머나먼 나라로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편 137편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그들은 그 외딴 곳에서 원수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울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다 잃어버린 비통한 심정, 그 심정으로 울었습니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때의 서러움으로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렇게 살다가 죽는구나 하며 우는 울음이었습니다. 탕자가 모든 것을 잃고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며 우는 울음이었습니다. 답답하고, 서러운 울음, 한이 담긴 울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나라 중에 팔라우 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팔라우에는 ‘아이고 다리’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그곳에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 힘겨워하면서 지은 다리라 하여 아이고 다리라 부른다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이판에, 팔라우에, 괌에서 그 밖의 수많은 열대 나라에 끌려가서 일본사람들에게 욕먹고, 맞으면서 죽도록 일하였습니다. 그때 부르던 아리랑이 아직도 징용 아리랑이라 하여 그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낙서들, 그 서러운 마음이 담겨있는 노래 가락들은 지금 보고 들어도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 심정이 바로 오늘 이사야서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지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죽을 약만 있지 살 약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눈물과 아픔, 고통, 서러움, 그리움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이사야서의 외침이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선포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각각의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울고 있는 사람, 절망하여 죽고 싶은 사람에게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자녀를 위로하라 하나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아픔을 두 눈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그 아픔과 그 눈물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 몸으로 함께 끌어안고 아파하셨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그 탄식의 생생한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의 아픔을 위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위로하심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16~17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또한 18~19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멀리서 보시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해결하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가운데 길을, 큰 물가운데 지름길을 내신다 선포하셨습니다. 뽕나무 밭이 온 바다로 변해갈 때, 그것을 피하여 비껴날 데만 있어도 다행인데, 그 큰 물 가운데 지나갈 길, 출애굽의 길과 같은 길을 내주시겠다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는 우리에게 놀랍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습니다.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 선포하시며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막막함에서 길되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또한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일시에 엎드려지게 하겠다.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겠다 하신 말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졌습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서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 말씀해주십니다. 사망에 강을 내겠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이 되셨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한 생수의 강이 우리의 배로부터 흘러나올 것임을 요한복음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들짐승, 승냥이와 타조가 함께 평화롭게 뛰는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화평의 나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애통하심과 함께하심, 그리고 그 회복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위로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절망에 있든지, 그것을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솟아날 구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참 어색한 방식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이자 해결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파서 누워있는 아픈 내 가족이 기도하면 바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 답답함을 해결해줄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귓가에 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를 가르고 큰 길이 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병사를 다 부숴뜨린 것처럼, 바로 내 삶에서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들을 물리치고 내가 승리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삶의 고질적인 그 문제들이 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결정적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는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인 축복과 함께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해결해주시는 것, 이 고난을 극복시켜주는 것, 성공하고 성취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영 신학을 발전시키고, 성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위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그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궁극적인 절망에서 헤메이게 될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의 위로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우리의 위로자이신가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그 선포를 진지하게 내 삶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걱정합니다. 염려합니다. 조급해합니다. 잠시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내 신앙의 본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내가 정말 십자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인가, 내가 정말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우리가 예수님만은 바라보는 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염려가 많은가? 그 바라봄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됨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온전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기대하며 오늘 기도하러 나왔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십자가에 우리의 두려움, 걱정, 근심을 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온전히 믿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근심과 걱정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기뻐하게 해주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닌 것을 우리의 안정, 기쁨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우리 옆에 지금도 함께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과 함께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십자가를 우리의 마음에 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라면, 설령 우리가 굶어 죽어도, 우리가 헐벗어도,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천대와 멸시를 당해도, 십자가에 못 박혀도 그래도 좋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불길 속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시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빈하거나 부하거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기에 어떠한 어려움도 기쁨으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길이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만이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는 그분의 사랑 속에 우리가 거하게 함으로, 감격 안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삶 속에서 십자가를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로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이웃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있어야 내가 살겠다 하면서 나를 위한 것들을 쌓기 위해 모든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예수님 한분이면 족하다 하며 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자유로 나보다 약한 자를 돌보는 마음,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누는 것을 통해 이 땅에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참된 위로를 이 절망의 땅위에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씨앗은 우리의 사랑이며, 희망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것을 이기셨고, 또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바로 여기가 이미 솟아난 구멍입니다. 멀리서 오는 언젠가 임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여기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