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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믿음 (2020.12.04. 금요기도회 설교, 야고보서 2:14~25)

 

야고보서 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몇년 전, 시크릿이라는 책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수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동서고금의 지혜자들이 깨달은 비밀이 있는데, 무엇이든 그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을 생각해라, 계속 생각해라, 이루어 질 때까지 계속 생각해라, 무조건적으로 생각해라, 그럼 우주의 에너지가 그것을 이루어줄 것이다, 이루어졌다고 확신하고 지내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품고 굳게 믿고 확신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책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믿음은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믿음과는 다른 믿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믿음을 이러한 시크릿 책에서의 믿음과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저 바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과 시크릿의 믿음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믿음이 누구에게서부터 오는가에서 비롯됩니다. 시크릿의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지만, 우리가 믿은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시크릿의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굳게 붙드는 믿음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시크릿 류의 믿음은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기의 생각, 자기의 욕망, 자기의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기의 것들은 점점 사라지고, 예수님의 것들이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아 믿음은 내가 스스로 움켜쥐고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똑같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정작 믿음의 내용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들의 잘못된 이해를 짚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차근차근 예를 들어가며 그들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믿음, 성령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참된 믿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14~17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는 14절에서 선포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더라도, 그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17절에서 이어서 분명히 선포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15, 16절 말씀을 통해 이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과 내가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에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히 관계적인것이요, 믿음은 연결됨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도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의 헐벗음은 나의 헐벗음이 되는 것이요, 그의 굶주림의 나의 굶주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난은 나의 가난이 되는 것이요, 그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관계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이웃과 철저히 단절된 관계 안에 있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하여 알고 있을 뿐, 주님 안에 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요,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포하였습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드러나지 않는 믿음, 사랑과 연합이 없는 믿음,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18절에서 선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당신은 왜 행함만을 강조하고 믿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신은 행함을 주장하지만 자기는 믿음을 지킬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행함과 믿음은 절대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구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겠습니다. 저는 행함으로 제 믿음이 무엇인지를 당신께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행함이 없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에 관하여, 교리에 관하여 아는 것일 뿐,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관하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런 믿음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서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서울에 대해 더 잘 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경험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과 실제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과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롭게 사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자아는 내려놓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되고, 자연스럽게 그 행동도 예수님의 뜻대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는 이와 다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삶의 장식처럼 활용하고, 예수님을 자기 구원을 위한 도구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예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잘 알고 믿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만일 이러한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어떤 결단을 보였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20~25절 말씀입니다.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는 먼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와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고, 이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하였을 때, 그것이 잠시잠깐 이해되지 않았어도, 아브라함은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로움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의 삶의 행동이 곧 그의 믿음을 그대로 보증하여 주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라고 선포함으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 관계로부터 오는 행함이 드러날 때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기생 라합의 이야기를 곁들임으로 자신의 주장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의 신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결단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결단이 그녀의 믿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요, 말씀은 그 행동을 의롭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야고보사도는 26절 말씀을 통해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확정하여 선포하였습니다.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오늘 말씀을 자칫 오해하여,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올바른 행동을 한다하여도 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율법주의에 빠져서 교만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안에 있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에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그 사랑과 용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 거하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바뀝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삶을 살게됩니다. 성령님의 교통하심 가운데 예수님과 연합하여 나와 하나님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나와 내 이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진실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이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내 이웃과 관계가 없는 믿음은 말씀이 선포하는 그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이 믿음의 깊은 세계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됨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줍니다. 참된 구원과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삶과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이 놀라운 믿음, 살아있는 믿음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안에 가득 채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