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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주님께서 주신 선물 (2021.10.29. 금요기도회 설교. 베드로후서 3:1~13)

 

베드로후서 3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다는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날에는 하늘이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하늘과 땅을 바라보도다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가르침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와닿지 않는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재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어디에서 오신다는 걸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사람에게 보이신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벤쿠버 상공에 오시면, 반대쪽 두바이에서는 안보일텐데 어떻게 하시려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이러한 생각들을 해보다보면 정말 주님이 오시긴 오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한 재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재림 신앙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너무 바쁘고, 하루하루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사도신경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고백을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적인 고백 하나가 바로 재림에 관한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돌아오신다는 믿음, 다시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부활 생명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신앙 고백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고, 또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게 하기에 우리는 재림에 관한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재림에 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비단 오늘날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재림에 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재림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했던 사도들은 하나 둘씩 순교하거나 죽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영지주의자들은 재림을 부정하고, 영적인 세계에 관한 지혜로 스스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가르침들에 얽혀 성도들은 점점 재림에 관한 믿음을 잃어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형편속에서 성도들이 다시한번 재림에 관한 믿음을 굳게 세울것을 권면하였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제 두번째 편지를 여러분께 씁니다. 베드로전서에 이어서 베드로후서를 쓰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통해 성도들에게 진실된 마음, 순수한 마음을 일깨우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전하라 명령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다시 오셔서 땅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전체를 통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과 이단의 위협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본질을 붙들고 나아가도록 이처럼 편지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것을 알고 믿고 붙들어서 모든 이단들과 박해자들을 대적하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을 세상의 비아냥과 조롱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아냥 거렸습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 이렇게 어리석게 사느냐? 너희는 정말로 너희의 구주가 다시 오신다고 믿고 있느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도 죽었지 않느냐?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너희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조롱하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세상의 조롱에 담대히 맞설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붙들고 나아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모든 믿음 , 고난 가운데에서 끝까지 붙들어야 것은 재림에 대한 믿음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재림에는 모든 것에 끝이 있고, 모든 것에는 책임이 있다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의를 위해서 고난받고 박해를 받아도 견딜 있는 힘이 되고,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줄 있는 바탕이 됩니다. 꿈과 비전과 부르심에 따라 있는 근거가 되고, 모든 삶을 주님 뜻대로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만일 세상이 그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그저 이렇게 왔다가 가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없을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종교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죽음 이후와 세상의 끝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펴보면 로마의 유물 죽음과 관련된 유물은 많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에 그들의 삶은 철저히 현실의 쾌락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콜로세움, 목욕탕, 성매매를 위한 장소들과 같이 쾌락이 이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죽음이 허망하기에 그저 지금의 삶을 즐기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답이 없는 , 그저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을 바라보는 , 책임을 바라보는 ,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우리의 모든 삶은 심판대 앞에서서 계수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보혈에 적셔져 사는 , 기꺼이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사는 삶을 칭찬하시고 영원한 복락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받을 기쁨은 지금 땅에서 우리가 견뎌야 어떤 고난보다도 크기에, 우리는 기꺼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1운동역사의 주인) 베드로 사도는 노아시대를 예를 들어 설명하며, 지금만 생각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확실히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성도들에게 이렇게 재림이 더디 되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8~10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다는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날에는 하늘이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선포하였습니다. 우주가 생겨난 벌써 138억년이나 되었습니다. 그중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시간은 고작 2천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정말로 찰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시간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쓰시는 분이시요, 천년을 하루처럼 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간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기에, 그저 주님을 신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재림이 이렇게 더디 오는가, 나아가 우리의 인생의 숙제들과 기도제목들이 이렇게 더디오는가 하는 질문들에 베드로 사도는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의 시간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조각가는 칼로 작품을 만드시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시간으로 그분의 작품을 만드십니다. 주님께서 재림을 더디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동시에 주님의 날이 도둑같이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선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하늘이 크게 울리고, 불이 임하고, 모든 일이 주님 앞에 드러나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주님이 오심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선포하였습니다.  11~13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1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하늘과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 사도는 이와 같이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정직하고 정의롭게 사는 , 기꺼이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때에 주님께서 모두 헤아려주시고, 모두 갚아주실 것을 믿으며, 오늘 하루 주님 뜻대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삶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다름아닌 시간을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명은 다름아닌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삶이란 다름아닌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시간을 귀히 여기고, 다른이의 시간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시간을 귀히 여기기 위해서는 바로 시간의 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의 인생은 끝이 있고, 역사 또한 끝이 있습니다. 세상은 끝을 죽음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끝을 주님과 다시 만나는 ,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로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끝이 허무한 사람은 또한 허무하게 보내고, 생명 또한 허무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모든 시간이 주님께 드려진 시간, 모든 생명을 주님께 드려지는 생명으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12 1절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시간들을 재림을 바라보며, 모든 시간들을 예배로 드리며 살아갑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뜻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영광이요, 가장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은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