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2013.6.28. 금요기도회 설교) 


누가복음 8장 26~39절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 즉 이르되 2)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아동부 아이들과 함께 밤을 지내는 일이 있으면, 꼭 아이들이 밤마다 부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 귀신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보통의 귀신이야기가 자칫 아이들에게 잘못된 귀신관을 심어줄까 싶어서 이야기해주지는 않지만, 저도 어린 시절에 귀신이야기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서 참 아이들은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놀이동산에 가도 꼭 귀신의 집이 있고,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도 많은 인기를 끌고, 여름만 되면 꼭 귀신이나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들이 대거 개봉하는 것들을 보면 참 사람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귀신 하면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흡혈귀나 드라큘라같이 피를 빨아먹는 귀신도 있고, 늑대인간이나 구미호 같이 동물과 사람 모두의 모습을 가진 귀신도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귀신은 한을 품고, 슬픔을 가진 처녀귀신과 같은 모습도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무속신앙에서 귀신은 노엽게 하면 화를 일으키고, 잘 모시면 복을 가져다주는 신의 모습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잘 달래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복을 받기위해 잘 모셔야 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든지, 사탄 마귀를 재앙을 주는 두려워하는 대상으로만 이해한다든지 하는 오해를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귀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요 지천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고 하늘과 땅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뜻입니다. 귀신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죄를 짓지 않는데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을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가 사탄의 계략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복음 가운데 거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같이 2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오늘 말씀의 귀신의 대답은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귀신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인간의 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반지하 주택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반지하 주택에 햇볕이 잘 닿지 않는 부분에 잘 생기던 것이 있는데 바로 곰팡이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닿지 않는 부분, 곧 어두운 부분에 곰팡이처럼 존재하는 것이 귀신입니다. 귀신은 인간이 가진 죄의 그림자 속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모습이 곧 귀신의 모습이요, 우리가 복음의 빛 가운데 들어갈 때 사라지는 것이 곧 귀신입니다. 


오늘 말씀에 귀신은 먼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이미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귀신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당들의 굿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새파란 칼날 위에서 춤을 춥니다. 티비의 몇몇 프로그램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의 무당들은 병을 고치기도 하고 불 위를 걷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일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 여전히 죄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길흉화복을 점치고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장수를 이끌어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죄 가운데 거해있고, 우리가 죄의 문제를 떠나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귀신과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존재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일에 온 집중을 다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둘째로 귀신은 하나님과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었습니다. 28절에 보면 귀신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항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과 간섭에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반항을 하는 모습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고백할 때, 그 자리는 바로 죄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로 귀신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선악과 앞에서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유혹했던 귀신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네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특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 곧 죄의 특징 그대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귀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괴로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에서 귀신은 예수님에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외쳤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멸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죄는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 같이 창세기 3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 심판의 댓가인 그 자신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로초를 찾으려 했던 진시황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나시며, 이삭을 만나시며, 야곱을 만나시며, 모세를 만나시며 여호수아를 만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로 귀신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 안에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귀신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 하나님과 관계를 거부하고,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귀신의 모습은 우리의 죄 된 본성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때 그 속에는 귀신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귀신을 생각할 때 무섭고 재앙을 내려주고 불길한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귀신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 자리,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괴롭다. 하나님이 귀찮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두렵다 하는 그 자리에 아주 달콤한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신 들린 자의 삶은 어떠할까요? 오늘 말씀은 귀신들린 자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9절의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을 또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며, 아 귀신들린 사람은 이렇게 미친 모습을 보이는 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나타난 귀신 들린자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몸을 위한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안전한 집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그대로 맞았을 것입니다. 더워도 더위를 피하지 못하고, 추워도 추위를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죽음의 땅 무덤사이에 거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나타난 주엄열매를 먹으며 연명하던 둘째 아들의 모습이 곧 이 귀신들린 자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지나가던 사람들을 해쳤습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가두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쇠사슬과 고랑에 매였고, 난폭하게 그 고랑과 쇠사슬과 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억압과 눌림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광야의 험난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우리의 모습이 이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우리는 어느 곳에도 보호 받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에선 매순간 삶의 수많은 고통들 속에 노출되어, 운명이라 체념하며 하루하루를 눈물 속에 살아가곤 합니다. 미래가 두렵고, 불안한데 희망을 찾을 수 없고, 안정감을 찾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위해 스스로 돈을 모으기도 하고, 높은 자리나 명예를 추구하기도 하는 데, 때로는 그것이 우리를 묶는 굴레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거나 사로잡기도 합니다. 나의 안정과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에서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의 자살이야기가 아무리 크게 들려와도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광야 같은 생활을 매순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광야를 이겨낼 수 있을 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고통과 슬픔이 이 땅을 가득 메워가고 있는 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엔 죄가 편만해지고, 그 가운데 죽음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귀신들린자의 삶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삶을 완전히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구원과 복음을 선포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19절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선포하시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선포하셨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선포하시고,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가장 먼저 하신 사역은 바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이셨습니다. 귀신들려있는자들, 곧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내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예수님 복음의 본질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세상 권세에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해 눈먼 자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이요, 동시에 육신의 눈이 멀어 가장 비참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다시 봄을 허락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에 눌려 고통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여 자유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귀신의 권세, 곧 죄의 권세에 눌려있는 자들을 해방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죄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죄 때문에 약한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해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떠했을까요? 귀신의 운명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의아한 말씀이 나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돼지에게 들어갈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왜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려고 할까? 돼지에게 들어가서 무엇을 하려고 할까? 그들이 돼지에게 들어가려고 하는 모습은 끊임없이 누군가 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통해 나타납니다. 귀신들은 자신의 죄 된 본성을 사람이 아니면 돼지를 통해서라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죄의 끈질긴 속성, 귀신의 끈질긴 속성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들어가는 것은 한 마리의 돼지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거의 이천 마리의 돼지에게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귀신들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 속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이 돼지들에게 들어갔을 때 모든 돼지들은 호수에 뛰어 들어가 몰살하였습니다. 죄의 끝이 곧 사망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귀신들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망으로 몰아치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 곧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끊임없이 나아와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는 그 자리가 귀신과 함께 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의 부활을 통해서 모든 악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더 이상 악한 권세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귀신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일들과 귀신이 떠나갔을 때 회복된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죽은 이천 마리의 돼지 떼들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이 떠나가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모습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았으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두려워하며 떠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진짜 귀신 들린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반면 회복된 사람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디에 있는 지 예수님과 함께하며, 나아가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전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를 포함한 우리 삼각교회 성도님들은 어느 자리에 서있을까요? 우리에게 놓여진 예배의 자리가 있고,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함께 모여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전교인 수련회의 자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귀신들린 살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죽음의 길로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