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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에서 기쁨으로 (2013.8.30 금요기도회 설교)


누가복음 13장 10~17절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지난 한 주 잘 보내셨습니까? 이제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비도 한차례 오고 무덥던 기세도 이제 꺾였습니다. 하늘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가을이 어느새 훌쩍 다가온 것 같습니다. 가을은 독서에 계절이요, 결실의 계절입니다. 또한 남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깊이 사색할 수 있고,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바쁜 와중에서도 그 틈을 내어 신앙의 깊이를 찾아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어떤 심정으로 나오십니까?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나오시기도 하시고, 어떤 분은 힘들고 지쳐서 위로받고 싶은 심정으로 나오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또한 어떤 분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기 위해서 나오시기도 하시고,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해서 나오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함께 있는 성도간의 교제가 좋아서 나오시기도 하시고, 또한 찬양과 예배 그 자체가 기쁨이어서 나오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심정으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어떤 심정으로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회당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18년째 귀신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이며, 둘째는 그 회당의 회당장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8년째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심하게 굽었습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척추가 녹아 내려 앉은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도 군대에 있던 시절 허리가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허리가 아파보니깐 허리는 단순히 몸의 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허리는 몸을 지탱하고, 몸을 붙들어주는 기둥이기 때문에 허리가 아프면 온몸을 제대로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일상이 고통이고, 심지어 세수조차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살짝만 삐끗해도 그럴진대, 허리가 완전히 꼬부라진 그녀의 고통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마 하루하루가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결혼도 쉽지 않았겠지요, 씻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복지가 없던 그 시대, 그녀는 아마 먹고 사는 건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여 살아갔을 것입니다. 행색을 초라하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늘 소외되어 있는 삶 그 자체가 이 여인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녀는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귀신들려 앓고 있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없는 고통받는 삶, 악한 세력에게 억눌린 삶,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상실과 외로움, 슬픔과 눈물 일상이 된 삶,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말라가는 꽃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리가 꼬부라지면 가장 보기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네 하늘입니다. 그녀는 눕지 않는 한 하늘을 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늘상 땅 만 바라보고, 늘상 고개를 숙이며 살아갔을 그녀에게 하늘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녀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사는 삶,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낙망한 채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회당장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당장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회당장은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오랜시간 율법을 배우고, 역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 남유다로 갈리고 각각 앗수르,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래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게 계속해서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게 지배를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외세로부터 학대당하고, 억압당하며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지 않고 있음을 답답해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을 잘 지킨다면, 우리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세와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올 것이요, 이스라엘은 다윗 때와 같은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철저히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실은 어떤 상황과 상관없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가혹해보인다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해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희망이자 능력이었고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라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그들을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상황이 전혀 이 두 사람은 오늘도 회당에서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대에 회당안에 들어올 수 없었던 여인은, 더군다나 장애인이었던 그 여인은 회당 밖에, 회당장 바리새인은 회당의 중심에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처럼 바리새인은 강론을 하였고, 이 여인은 회당 밖에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큰 교회에 다닐 때 한 가지 늘 부끄러웠던 것이 있습니다. 큰 교회 앞에는 늘 구걸하는 사람들,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번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냐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 이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있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알아야 하는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은 데 그것이 일상이 되다보니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고 형식적인 모습이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여인도 그런 일상이 되어서 회당에서 자기의 역할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회당에 오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를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적, 모든 역사,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오시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모인 이 회당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 곧 율법을 따르고자 회당에 모였는데, 예수님이 드러나자 사실은 그 하나님을 위한 자리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동굴 속에서 태어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이곳에는 낮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태양을 보고 아 동굴 속에는 낮이 없었구나 깨닫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정확이 말하면 회당 밖에 있는 여인을 회당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직접 만지시며 네가 내 병에서 놓였다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 불러주셨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사는 운명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귀신에 매여있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불구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일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안식일에 회당에 와 있으나 정작 하나님의 은총에서 소외된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직접 다가가셨습니다.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에게,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그녀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놓고 살아갑니까?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은 여기까지야 하면서 얼마나 스스로 선을 그으며 살아갑니까? 이 여인은 당시의 문화에 따라 자신은 회당에 들어올 수 도 없는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여인처럼 스스로를 낮게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또한 이 여인처럼 부르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내가 늘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이 부르심에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깨우침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회당장은 오랬동안 열심히 회당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해서 열심히 율법을 준수하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열심은 예수님과 만났을 때 그대로 그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날을 두시고 굳이 안식일에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서로 분쟁하지 않고 여인을 치료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안식일에 고쳐주신 것 같습니다. 이 고쳐주심은 사실 회당장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회당장의 열심히 과연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고침을 통해 회당장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회당장이 분을 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아닌 율법과 회당을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은 분을 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소유나 생각, 신념이 강탈당한다고 느낄 때 화를 냅니다. 회당장에게 있어 안식일의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장은 이미 율법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회당 또한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자기의 회당에 들어와 자기의 법칙을 깨고, 자기의 꿈을 짓밟는 예수님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화를 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것입니다. 


또한 회당장이 율법을 사랑하는 것을 뒤집어서, 진정으로 회당장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 속에서 사람은 소외되고, 동물은 존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으나 자기 소유를 사랑하는 마음은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진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 율법을 통해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를 잃어버리게 된것입니다. 소나 나귀는 지키되 18년동안 고통받는 여인은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소나 나귀는 외양가에서 풀어주나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여인의 사탄으로부터의 매임은 외면하게 된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사탄의 매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매임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줄 것을 기대하고 주신 안식일에 하나님의 일은 정지되었습니다. 굳어진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소유를 챙기게 됨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이 없어졌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회당장은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으나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긍휼없는 그 마음은 하나님과 니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영적 이스라엘이 회복되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새 예루살렘이 되었음을 보고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안식일은 고통은 있으나 치유는 없었습니다. 멈춤은 있었으나 안식이 없었습니다. 율법은 있었으나 은혜가 없었습니다. 가르침은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순종했던 회당장의 모습과, 하나님의 뜻과 법이라 생각했던 가르침 아래에서 자신의 삶을 체념했던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 없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인의 모습이나 회당장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넘어서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에 열심인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순종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함에 있어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에 순종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 안에 있는 깊은 사랑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우리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은혜가운데 있구나 깨닫게 되고, 내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움켜쥐는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가 바가지로 머리위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은혜에 바다에 빠뜨리시는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사랑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나의 우상이었구나, 아 내가 믿었던 이것이 바로 내가 믿고 싶었던 것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오늘 여자는 허리가 펴지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 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죄를 깨닫게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우상 숭배 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에 나왔습니다. 여인을 부르신 그 부르심으로, 회당장을 다그친 그 다그침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가 널 회복하겠다.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고백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