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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이 구절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의 후렴입니다. 시인은 이 구절을 몇 번을 반복하며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고향이 사무쳐서 꿈에서라도 잊을 수 없다는 표현이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가나안 땅에 가까워 올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땅, 야곱과 요셉의 고향, 곧 자신들의 뿌리 이스라엘이 그리웠겠지요.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분명히 이스라엘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생명과 말씀의 땅 가나안을 코앞에 두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세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광야에 있을 때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절망적이었죠. 그들은 자신들을 메뚜기에 비유하며, 거대한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겁을 내었습니다. 젊고 믿음이 강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선포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겁을 먹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광야에서 40여년을 더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여호수아가 세워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단강을 앞두고 가나안 동쪽 건너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평소 요단강은 물줄기가 약한 큰 시내 정도의 강입니다. 그러나 사실 건너편에 있던 가나안 족속들이 훨씬 더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앞에서 강보다, 마음의 강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앞에 강은 오히려 좋은 핑계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파격적인 명령을 하셨습니다. 법궤를 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가장 앞서 갈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법궤를 들고서 무장을 하거나 정찰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법궤를 들고 있으니 그들은 방어에 가장 취약하였습니다. 방어는 커녕 헤엄조차 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배나 안전을 위한 도구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적들과 강줄기에 노출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기력한 상태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에 의지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요단강 물이 멈추어 세워지고 마른 길이 생겼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한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 주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무기력한 방식,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 온전히 순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무언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려 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고, 은총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죽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젖은 생명이요, 꿀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 나라에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은총을 바라봄으로,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우리 아동부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