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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주님의 눈


형태 :    분석 설교

학번 :   201231034

이름 :     김 동 희


제목 : 나의 눈, 주님의 눈




▶ 설교 본문


사무엘상 16:1-13


▶ 설교 주제문


외모만을 바라보는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자.


▶ 주제 설명문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 외모와 중심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 우리의 중심이 실제로 드러나는 모습은 모두 외모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중심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중심조자 잘 살펴보지 못하기 때문에 외형적 신앙의 모습이 곧 우리의 중심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예법에 맞추어 잘 드리는 예배, 겉으로 드러난 성품과 행동, 헌신이나 헌금과 같은 외형적 모습을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심지어 자신의 모습조차도 이러한 외형의 모습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을 때 훌륭한 외형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훌륭한 외형이 있다고 해서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훌륭한 외형은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아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오히려 훌륭한 외모의 모습을 가진 이는 자신이 중심이 훌륭하다고 기만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그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여야 한다. 다윗처럼 나는 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자기 비움과 자기 낮아짐의 고백이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 중심은 오로지 자신의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를 내려놓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중심이다. 



▶ 설교 목적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핵심가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두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기름부음을 받는 삶을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마음이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설교는 청자로 하여금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깨달음으로서 내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고, 다시 복음을 깊이 받아들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서 론 



학교 주변에 아름답게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꽃을 보면서 아 이제 봄이 왔구나 하며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꽃이 피었기 때문에 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오감을 꽃이 자극해주어서 변화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지요. 올해는 꽃이 조금 더 빨리 피었기 때문에 봄도 더 빨리 온 것 같습니다.


요사이 요상한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늦가을에 개나리, 벚꽃이 피는 것이지요. 아마 지구온나화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기후가 자주 변하고 온도가 들쑥날쑥하니 꽃나무들이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이 오지도 않았는데, 꽃이 피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데 꽃은 점점 만개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 꽃이 피었으니 봄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까요? 아니면, 저 꽃이 이 계절과 어울리지 않으니 무엇인가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두 번째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제 눈앞에 벌어지는 것과 그 본질이 다를 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의 접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서 처음으로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에 보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왕으로 세워질 때에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고, 적들과 싸울 때에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암몬을 격멸한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교만해져갔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조급해져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사무엘 대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의 모습에 후회하셨고, 그를 버리고 새로운 왕을 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다윗을 찾아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당신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형들의 외모에 속지 말라는 1차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동시에 다윗이 적격자로 선정된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심은 히브리어 ‘레바브’로 마음, 영혼, 생명, 행동, 사고방식, 지식, 지혜, 속부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그 기준을 무엇에 두시는지를 드러내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다윗의 삶과 사울의 삶을 비교 분석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본문의 재경청 

  



본문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씀 사무엘상 16장 6-7절까지 말씀을 공동번역 개정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하고 이르셨다. 


 

주제의 부상 

 



얼마 전 압구정동에 다녀올 일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다녀왔습니다. 압구정역을 내리면서 제 눈을 휘둥그레졌습니다. 온통 성형외과의 사진들이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모는 이래야 한다. 외모는 저래야 한다 하면 모든 사진들이 저에게 완벽한 외모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 같았습니다. 더욱 더 재밌었었던 것은 이러한 글들이었습니다. 외모가 달라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마치 외모가 그 마음의 중심까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절대적인 외모 중심주의적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외모가 우리의 중심마저 결정짓는다는 메시지를 우리를 매순간 받게 됩니다. 그 압구정동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외모는 참 허름했습니다. 백화점 직원은 저의 생각과 마음의 중심이 어떠한지, 하다못해 제 지갑의 중심에 얼마나 들어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뚝뚝한 말투와 차가운 응대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넌지시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작은 대접, 작은 말투, 작은 손짓 하나로 우리는 우리의 중심보다 외모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습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에도 잘 드러납니다. 교회 건물들을 보면 날이 갈수록 그 외모가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려 치면 가장 좋은 옷, 가장 비싼 옷으로 차려입고 가야합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외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중심은 점점 허물어져갑니다. 서로가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통해 판단합니다. 외모로 중심까지 규정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사 사무엘도 외모와 키 앞에 흔들렸습니다. 중심을 보는 것은 그처럼 어렵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중심입니다.





주제에 대한 정의 (What)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보시는 바른 중심이란 무엇일까요? 


열심히 하는 마음만이 바른 중심 일까요? 아닙니다.


또, 완전하게 하는 마음만이 바른 중심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만이 바른 중심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중심입니다. 다윗 역시 실수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하였습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반응되었을 때 회개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능력과 지혜를 갖게 되었고, 동시에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란 그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 앞에서 은총에 반응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제의 필요성 (Why) 

   


어느 한 토기장이에게 두사람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토기장이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공방을 맡길 수제자를 뽑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제자 중 어느 제자가 진실된 마음으로 일하는 지 확인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이 제자들에게 각각 두 개의 장독을 만들어 올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앞에 사는 노인에게 줄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각각 공방에서 며칠에 걸쳐서 두 개의 장독을 만들어 가져왔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장독은 모두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을 띄고 있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제자들이 만들어 온 장독 중 앞집 노인이 쓰기로 한 장독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제자가 온 몸을 던져 자신이 만든 장독을 받아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비록 과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장독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제자에게 있어서 장독은 과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만 이 제자에게 있어서는 장독 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장독을 마음 속 깊은 곳 곧 중심에서 사랑하지 않은 제자의 장독은 산산 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중심은 외형으로 온전히 판단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외형을 통해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과 복음 앞에서 서서 그 원하시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을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도 스스로에게 속아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주제의 실천 방안 (How)

    



그렇다면 중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안점1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선 포 1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b).”



해 석 1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모를 보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부강함을 보고 신정체제의 자기 나라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높은 성과 화려한 궁전, 넓은 영토를 가진 강한 나라를 원했습니다. 이는 모두 외모와 외형을 보는 사람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결과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울왕 역시 이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멜렉의 화려함과 풍요로운 외형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각을 살리고 모든 것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상황과 정세에만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함정은 사무엘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름을 붓는데 있어서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한 엘리압에게 끌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외모를 보는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명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가진 한계입니다.



적 용 1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백성이나 사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무엘도 실수하였는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며, 그가 가진 것, 학벌, 집안, 스펙 등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사회나 회사, 나라를 볼 때도 우리는 이러한 실수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외형적인 면을 더 먼저보고 그것으로 내면을 오해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이러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더 큰 교회, 좀 더 열정적인 사역자, 좀 더 지적이고 발전된 신학교를 보며 우리는 감탄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건강한 교회를 보며 감탄하고, 조금만 문제가 발생하면 비판하는 모습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더욱 더 심각한 점은 우리 스스로를 보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외모를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열정적인 신앙생활이나 신학적 담론, 화려한 설교, 섬김과 봉사, 사역들을 보면서 우리의 중심이 바로 서있다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모를 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의 눈이 왜곡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중심을 바로 잡을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통해 중심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예 화 1


세종대왕 때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항상 허술한 옷차림의 촌부의 모습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성묘 차 온양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어느 여관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영남에서 올라오는 호화로운 선비의 행차가 있었지요. 맹정승은 방 하나 얻지 못하고 낭하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바둑을 좋아하는 선비의 요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 바둑을 두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초면이므로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맹 촌부가 먼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말할 때 묻는 말에 마지막에 공을 붙이고 대답 끝에는 당을 붙이기로 합시다."고 하였더니 선비는 "서울로 간당"하고 대답했습니다. 관심이 생긴 맹 정승은 다시 묻기를 "무슨 벼슬이공?"하였더니 선비는 "녹사취재 벼슬이당"했습니다. 그래서 맹 정승은 "내가 힘써 줄공" 하였더니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네 같은 촌부는 택도 없는 소리당"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환담을 하다가 선비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이제 녹사취재 벼슬을 얻게 되어 3정승 6판서가 모인 정청으로 신고 차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6조 판서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선비를 본 맹정승은 "어찌된 일인공?"하고 말을 건네게 되었지요. 낯익은 목소리에 선비가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금관조복의 좌의정이 바로 그 촌부였던 것입니다. 전날, 촌부인 줄로만 알고 무례하게 대했던 선비는 정신이 산란해져서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당"하고 맥없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선비는 맹 정승의 지도로 청백한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안점2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형으로 중심을 포장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길 원하십니다.



선 포 2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사무엘상 16:11).”



해 석 2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뽑는 데에 있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름대로 왕의 모습을 가진 자를 자신의 눈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판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기다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은 모든 이새의 자녀들을 살펴본 뒤에 또 다른 자녀가 있는지를 찾는 데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리해서 일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문제가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은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도 초청받지 못할 만큼 어리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최고의 외형을 가진 사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거꾸로 중심을 통해 외형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미미한 존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적 용 2


우리는 늘 조급합니다. 당면한 일이 잘 진행되어지지 않을 때, 눈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바로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그때 우리가 받는 유혹은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강성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새의 집에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무엘의 눈에는 이미 왕의 재목으로 훌륭한 엘리압이 보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면 아마 사무엘은 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큰 실수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마땅한 인물이 없기에 자신이 임의로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어도 큰 문제가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새에게 물어서 아직 오지 않은 다윗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모를 보는 사람들이기에 중심을 바꾸기 보다는 외형을 바꾸고자 하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선택하시기를 원하시는 데 우리는 외모를 보고 엘리압을 선택합니다. 특별히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중심을 하나님에게 향하기보다는 프로그램이나 재정, 사람들의 숫자, 눈에 보이는 성과와 반응들을 통해 외모를 드러내려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외형과 외모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중심이 잡힐 것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중심이 이러한 것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 있음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것은 외형으로 우리를 포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 화 2


 남미에 한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몹시 허기져 있을 때 그 나무의 잎을 씹으면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 나뭇잎을 씹음으로 음식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고 배고픔이라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은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뭇잎에는 영양분이라고는 전혀 없고 마약 성분만 있기 때문에 그 나뭇잎은 사람의 갈망을 채워 주기는 하나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음식물이라기보다는 모조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가짜 음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뭇잎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신이 음식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영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은 나무에 속아서 결국 죽게 된다.


화려한 외형은 이와 같습니다. 당장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에 속아서 왜곡된 대책을 내놓는 것이지요. 당장은 배고픔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순간의 고통만 멈추게 할 뿐 근본적인 죽음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형으로 중심을 포장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중심을 고치는 것은 외형의 변화를 통해서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주안점3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선 포 3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상16:1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해 석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버리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소견 곧 외모와 외형의 모습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달아 하나님과 다시 교제하고 연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른 중심은 바로 이 외모 곧 인간의 자기 소견에 좋은 것과 반대되는 것,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중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고 소통하고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안에 있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기를 원하였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마음에서 하나님과 사랑하고, 교제하고,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결과 다윗은 아름다운 찬양시를 남길 수 있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고, 범죄하였을 때 온전히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기름부음의 결과 다윗은 여호와의 영, 곧 성령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게 됩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게 되고,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온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마음 안으로 모시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곧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다시 선포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 정욕, 자랑, 높은 자리, 능력과 같은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 중심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중심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 용 3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그리스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맞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방식을 우리의 중심으로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형적인 방식으로서의 찬양은 좋은 노래, 화려한 세션, 웅장한 음악과 같은 방식입니다. 그러나 중심 이 바로 선 찬양은 이 찬양을 부르는 자신과 그 찬양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그 찬양을 매개로한 존재론적 관계에 집중합니다. 찬양을 부를수록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찬양하기에는 참 부족한 존재이구나, 죄가 큰 존재이구나 그런데 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나의 찬양을 받아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많은 내 존재와 선하신 하나님 사이의 이 간극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부활로 채워주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 뿐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를 하면서, 또 봉사를 하면서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놀라움을 성령을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예수님을 매 순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외형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중심의 변화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올 때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중심의 변화는 성령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지 외형으로 확인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중심의 변화에 온 지혜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께 간구하여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 화 3

 

“오,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준 사랑받으시고 찬양받으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오, 천사들의 하나님, 권세와 창조의 하나님, 당신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오늘 이 순간에 나를 귀하게 여기셔서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오니, 오늘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당신 앞에 기름지고 살진 번제가 되게 하옵소서. 거짓이 없으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전에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셨고, 오늘은 그것을 준비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에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함께 당신에게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옵소서. 아멘!


폴리캅은 최소한 86세의 나이에 위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순교하였다. 그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신 사람이었다. 그는 배교하면 살려준다는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미 86년간 그분을 섬겼으나, 나에게 한 번도 고통을 준 적이 없거늘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결연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부활의 새새명의 길을 따랐다. 




주제의 실천 결과 (What then)

 



윌리암 윌버포스는 1759년부터 1833년까지 살았던 영국의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와 관습 철폐, 그리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교역에서 돈을 많이 번 부자였고, 그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기 복음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숙부와 살았습니다. 그는 1784∼1785년 유럽 여행 중에 그의 교장이었던 아이작 밀러와 토론을 하면서 유명한 종교 서적 「영혼에서 종교의 발생과 진보」와 성경을 읽는 중에 심도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1785년 후반에 영적인 회심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후 그는 모든 노력을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윌버포스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 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 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 제도 폐지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은 많은 반대를 받았으며, 심지어 모욕적인 대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노예제도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무역 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으나 오늘날에도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윌버포스의 이러한 삶은 단순히 도덕적 이상이나 윤리적 계몽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인기를 얻거나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징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의지하며, 다른 주인들을 섬기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세례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갖으며 세례를 받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 뿐인 주권자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모두 드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들이라 보았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능과 소유와 시간, 그리고 영향력 등을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그리스도만이 참된 주인임을 인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윌버포스는 자신의 모든 중심을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이는 어떠한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윌버포스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우리는 외모의 발전을 중심의 성장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성장할 때 그것이 내면의 성장이라 착각해서 문제가 점점 심각해짐에도 방치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열심히 잘 돌아가고 있다면, 심지어 분위기와 상황이 좋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것처럼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함께 부활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자로서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과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심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