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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014.6.20. 금요기도회 설교)


고린도후서 13장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러분은 교회에 다니며 사람들에게 실망한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배신을 당하거나, 혹은 크게 다투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저 웬수 하면서 가서 화를 내셨나요? 아니면 내가 저 놈 안보면 되지 하며 없는 사람 취급을 하셨나요. 아니면 교회를 아예 옮기셨나요. 우리는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이러한 경험을 하거나, 이런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곳이고,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보니 이런 일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교회를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곳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9절에 보면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곳, 이곳이 바로 교회이요,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사실 우리는 모두가 곡식이 되기도 하고, 때때로 가라지가 되기도 하지요.


오늘 고린도전후서의 내용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 문제가 많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이 신경을 썼던 교회이기도 하지요. 고린도 전서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10대 문제라 일컬어지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려 볼 테니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분열의 문제입니다. 분파에 따라 나뉘어 싸우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도에 대한 오해의 문제입니다.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문제입니다. 넷째는 근친상간과 같은 성적 타락의 문제입니다. 다섯째는 교회의 문제를 사회 법정까지 가져가는 다툼의 문제입니다. 여섯째는 도덕적 타락의 문제입니다. 일곱 번째는 결혼 문제와 이혼의 문제입니다. 여덟 번째는 우상의 재물을 먹느냐 마느냐의 갈등문제입니다. 세상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지요. 아홉 번째는 은사의 질서에 관한 문제입니다. 열 번째는 부활 교리의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과 질문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가진 고린도교회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세히 대답하며 그들을 양육하고 돌보았습니다. 참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것이지요.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이 가르침에 따라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전에 보낸 편지로 자기 자신들의 갈등과 어려움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했다면, 이제 이후에 보낸 서신들을 통해서는 바울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진실성을 의심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왜 고린도에 들리지 않고 마케도냐로 가느냐? 하며 믿을 수가 없다 비난했습니다. 또 고린도 교회는 당신이 진정 사도가 맞냐? 예루살렘 교회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선교하는 사람은 아니냐? 비난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너무 초라하고 말도 못한다는 것이지요.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재정 사용에 대해서도 의심했습니다. 바울의 권위에 대해서도 의심했습니다. 바울의 영적 수준에 대해서도 의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모든 부분에서 비난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가르침으로, 우리의 열심과 사랑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도, 제자훈련이나 여러 프로그램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때때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 실망을 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나아가 미움을 갖게 되기도 하지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는데 너는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사람이 말을 하면 듣고 바꿔야지 너는 어찌 하나도 바뀌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에게 이런 생각이 들기고 하고, 자식들에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도 아마 그런 생각을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건만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인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극심한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선택한 길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들에게 분노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애써 변명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어떠한 것으로 선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참된 선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 참 안변한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저는 그 말을 믿는 편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본성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다녔던 제자들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그 놀라운 기적들, 놀라운 가르침들을 보고 듣고 경험했어도 그들은 모두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변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털털한 편에 속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참 정리정돈을 못합니다. 아이들과 막 뛰어다니다 보면 와이셔츠가 막 밖에 나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어릴 때부터 이랬습니다. 그렇게 혼이 많이 나고, 성적표에 주의가 산만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잃어버린 지갑과 돈, 핸드폰 가격이 수백만 원이 넘어가도 여전히 못 고쳤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차마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못할 수많은 죄성들이 여전히 그대로 내안에 있음을 매일 확인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세련되게 감추어집니다. 더욱 잘 숨기고, 더욱 잘 속이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 했습니다. 


이 복음은 무엇일까요? 이 복음이 오늘 우리가 고백한 그 말씀 안에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한 번 더 봉독하겠습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흔히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먼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 고백 중에 가장 먼저 예수님의 은혜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 안에 지긋지긋하게 바뀌지 않는 본성,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만 이 죄가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우리를 살리시고, 죄를 없애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지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못 박히심은 바로 우리의 못 박힘입니다. 예수님의 찔리심은 바로 우리가 찔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모독당하고, 비난받으며, 찢어지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여전히 꿈틀대는 그 죄를 없애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또한 복음이란 그 은혜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격을 잘 모릅니다. 저도 참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 선배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대학교에 들어와서 이렇게 좋은 수업을 듣고, 많은 배움을 얻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네가 잘해서냐 아니면 누군가가 너를 도와줘서 그런 거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저는 제가 잘해서 들어왔지요. 저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시험을 잘 봤고, 자격이 있으니 이런 혜택을 받는 거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거랑 이 사회가 너에게 혜택을 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실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네가 공부 잘하는 것, 네가 좋은 성적을 얻는 것, 이런 거랑 그 사람들이랑 상관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네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자신의 것을 너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금을 내서 학교 지원도 해주고, 기부금도 내서 장학금도 주고, 네가 이 학교를 나오면 인정도 해준다. 왜 그러겠냐? 너랑 그 사람들이 전혀 다른데. 그건 자신들의 것을 조금씩 나누어 줄 테니 네가 그 기회를 가지고 열심히 해서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 주라고 하는 것이다. 너에게 일종의 투자를 하는 거야. 그러니 그 투자 받은 걸 잘 키워서 가난하고, 힘들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대학도 이럴진대 우리의 믿음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정말 교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것이 무엇 때문이냐? 네가 잘해서냐? 네가 잘생겨서냐? 네가 성실해서냐? 네가 똑똑해서냐?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매순간 감격하게 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이 사랑에 반응해야겠구나. 다짐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비로소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은혜, 그리고 그 은혜 가운데 있는 놀라운 사랑,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삶으로 흐르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마음속에 심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서 흐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이 은혜와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은혜에 감격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곳이 바로 복음이 넘치는 곳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말씀을 보며 깨닫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찬양을 부르며 감격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밧줄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우리가 밧줄로 꽁꽁 여미어지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복음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을 고린도 교회가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바꾸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 정죄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변화되고자 합니다. 상황이 변화되고, 사람이 변화되고,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이를 위해 많은 것을 드리려 합니다. 정성을 다해 시간, 헌금, 찬송, 기도를 드리지요.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 자신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것을 받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곧 우리 자신을 구원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 성령님의 교통하심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예배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복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거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 이 복음 안에 있을 때 우리 안의 근본적인 갈급함이 해결되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변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주 잘 보내셨습니까? 혹 누군가와 싸우지는 않으셨습니까? 혹 답답한 상황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셨습니까? 혹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원하십니까?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님의 교통하심입니다. 하나님께 이 은혜와 사랑, 교통하심을 간구하십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에게 복음을 더욱 깊이 알기를 간구할 때, 그것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