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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들 (2014.6.21. 3여전도회와 함께하는 기도회 설교)


다니엘 3장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우리는 연예인들의 시상식이나 축구 선수의 세레모니를 보다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라는 고백을 간간히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레모니를 보면 어떤 생각들이 드십니까? 아 저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 가장 자신에게 영광의 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나도 어느 자리에서든지 잘하고 성공해서 영광을 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공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고 고백하고 간증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고, 동시에 너희도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몇 가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부작용들을 가져왔을까요?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개인의 성공을 통해서만 가져올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성공을 해야 하는구나, 거꾸로 말하면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구나 하고 스스로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두고 하나님께 똑바로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라 정죄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뒤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 받았다고까지 생각을 해버리기도 합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과 개인의 성공은 큰 연관이 없습니다. 물론 야곱이나 요셉처럼 성경에는 말씀을 따라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았고, 요시아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음에도 비참하게 살해당해 죽었습니다. 베드로, 바울, 그밖에 수많은 신약의 사람들이 세상적으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박해를 박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자청하던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히려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많은 간증 때문에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의 부작용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한 사람들의 타락이 주는 실망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우리의 성취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 영광, 내가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내가 높은 명예를 얻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지, 이러한 것들로 장식이 되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망각하고 자꾸 인간적인 것들로 영광을 돌리게 되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 오랫동안 칭송 받았던 록펠러는 큰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오래 하였고, 십일조를 잘 내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자신의 기업을 운영하면서 매우 탐욕적인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인간의 성취로는 온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 모습을 세 친구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끌려온 전쟁 포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발탁이 되었고, 비록 비참한 노예 신분이지만 바벨론의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까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왕은 생명줄과 같았고, 자신의 신분과 삶의 안정을 보살펴줄 유일한 반석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왕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곧 커다란 신상에 절을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커다란 신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에 끌려와있고, 바벨론 왕에 다스려지는 신세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고,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만을 숭배하였습니다. 제국의 문화, 제국의 방식, 제국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니가 지키는 그 믿음이 목숨보다 소중하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네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참 간단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질문앞에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 앞에, 우리의 상황과 형편 앞에, 우리의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 정말 쉽게 무너집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질문에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 앞에서,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 온전히 하나님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안에, 바로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힘을 자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존재가 자신들 안에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사 자신들을 구해주시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가장 위험한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낮아진 순간에 그들 안에 하나님이 계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그 자신으로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실 때 드러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언제 드러날 까요? 네 우리의 고난 가운데 드러납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었을 때, 성공했을 때 그럴 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없을 때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도저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도 없을 때, 내가 그래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고백하는 이를 보면 놀라게 됩니다. 아 어떤 하나님이시길래 이 사람은 이 신앙을 고백하는 가 생각합니다. 그때 참으로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은 바로 이러한 순간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5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이 곧 영광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고난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 존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서 살아났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왕이 목격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고백 속에서 이미 왕은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그을린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계심을 완전한 보호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왕은 이들을 보고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참으로 하나님을 모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너는 왜 이렇게 항상 행복하니? 너는 왜 이렇게 항상 감사하니? 너는 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니? 그 질문에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 생명으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