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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 (2014.8.24. 지역과 함께하는 예배 설교)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저와 제 동생들은 집에서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며 기다리곤 했습니다. 책을 보기도 했고, 방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도 하고,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열시, 열한시가 되면 부모님이 들어오셨고, 부모님의 무릎위로 뛰어 올라가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는 했습니다. 때로는 부모님께서 치킨이나 빵을 사오기도 하셨고, 그것을 먹으며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때 부모님께서 가끔씩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니들 때문에 산다.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젊은 부부가 비빌 데 없이 열심히 일만하다보면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을 테고, 중압감과 책임감 속에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었을 테고, 매일 고된 노동에 피로감과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어린 자녀들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기쁨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그 의미를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짧은 소설을 통해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우리는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우리의 삶이 그렇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사랑을 나눌 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그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볼 때 더욱 기쁩니다. 하다못해 티비에서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에도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면 신나게 웃지만 혼자 볼 때는 대부분 크게 웃기보단 속으로 미소를 짓고 맙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습니다. 최고급 한우를 구워먹어도 식당에서 혼자 구워 먹으라고 하면 그리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해주신 된장찌개, 사랑하는 손주가 할머니 할아버지 드시라고 만들어온 과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음식들은 그 사랑 때문에 참 맛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기쁨을 얻으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이처럼 삶으로 아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다같이 25절, 26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25절 한절이기에 성경을 펴고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바로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이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흐름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자신께서 자신의 모습대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코에 생기를 넣어 호흡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사랑의 피조물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애초에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얻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에 삶, 사람, 사랑은 다 같은 어원입니다. 삶, 사람, 사랑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멋대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없어지면 더 이상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삶이 파괴되고,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게 되었고,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고, 사랑을 경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사라진 사랑을 회복하고, 그것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은 삶을 살게 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사랑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셔서 이방인과 여인, 죄인들과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반하고 때리고 욕하고 죽이는 모든 인간들을 끌어안으시고, 죽음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죽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이 죽음의 문화 가운데 사랑으로 생명을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이제 참으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온전한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져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 사랑이 곧 삶이기 때문에, 내 사랑 가운데 있다면 너희는 죽어도 다시 살 것이다. 너희 안에 비로소 생명이 있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곧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래서 죽어도 살 것이다. 살아서 아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그 사랑이 너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순간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 가운데 있던 나사로를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나사로를 다시 죽음으로부터 회복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사랑을 보이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랑의 절정, 사랑의 하이라이트, 사랑의 극단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 밭에 사랑을 다시 심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정체였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그 사랑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한 온전한 몸, 온전한 사람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 사랑은 옆에 있는 사람을 세우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생명 가운데 거하게 하고 부활하게 합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통해 바라보아야 할 것, 간구해야 할 것, 소망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사랑을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지역 한사람이 이 사랑의 충만함 가운데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