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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 (2014.8.31. 오후예배 설교)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은 5여전도회 헌신예배입니다. 부교역자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하는데 공교롭게도 오늘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동부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참 많고, 제 아내도 5여전도회입니다. 특별히 귀한 말씀 잘 선포하라고 이 자리에 세워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오후 시간 피곤하실텐데 모두들 힘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아쉐레하이시, 호안드로포스 테오, 아마데우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어떤 때에 마음을 가장 걱정하십니까? 자녀가 받아쓰기를 0점 맞았을 때입니까? 장난을 심하게 쳐서 집에 있는 벽에 낙서들을 많이 할 때입니까? 언제 가장 마음이 아프셨습니까? 바로 자녀가 아플 때입니다. 많은 어머님들이 자녀가 아플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아픈게 자녀가 아픈 것을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 말씀을 합니다. 자녀가 아픈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출필고 반필면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 부모님께 나가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무사히 돌아왔음을 얼굴을 뵈며 아뢰라는 말입니다. 이 말 역시 항상 자녀의 건강과 안전을 마음에 두고 졸이는 부모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여름성경학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로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실 좋은 프로그램, 은혜로운 설교, 즐거운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지만 마음 한 구석에 다치지는 않을까 항상 졸이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혹시 다치거나 아플 때 부모님의 마음, 그리고 교사의 마음, 제 마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준비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것들을 신경 쓰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2박 3일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데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수십 년을 마음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어서 자녀를 낳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의 심정이 이와 같습니다. 여인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아가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혼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남편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인은 힘겹게 딸을 키우며 살아간 것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몹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흉악하게 귀신 들린 것입니다. 아마 이 때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신들린 딸이 있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 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한평생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딸은 점점 장성해가고 흉포해져 힘이 세지는 데 어머니인 자신은 점점 나이가 들며 약해질 것입니다. 여자를 천대하던 당시 문화 속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홀로 귀신들려 있다면 그 여인은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가장 심한 천대를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딸은 걸인이 되고, 천대를 받다가 길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딸은 자신의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소식이 이곳지역까지 퍼져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이야기를 더욱 퍼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는 가깝다면 가깝지만 멀다면 먼 거리였습니다. 백리길이 넘었습니다. 오십킬로는 너끈히 되는 거리였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두고 3-4일씩이나 갈 수 없는 거리였습니다. 딸을 먹여주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혹시 귀신들린 딸이 집을 도망치거나 사고를 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 이야기를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을에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조용히 마을에 들어가 한집에 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너무 유명해지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녀는 이미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신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간절함은 여인을 초인으로 만듭니다. 아픈 자녀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나라 끝, 세상 끝에 가서라도 약을 구해오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여인은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소리질러라는 단어의 원뜻이 쉬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는 뜻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제발 제 아이를 고쳐주세요.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주님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사람, 즉 유대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마도 유대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릴 때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예수님의 주목을 받고자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삶의 비천함과 간절함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삶의 절망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 저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역한다는 예수님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곳에 찾아온다면 언젠가 내 눈앞에 찾아온다면 나는 그분을 나의 메시아로 고백할 것이다. 그분께 내 삶의 전부를 던지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숱한 나날 예수님을 만날 그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그 글에 응답하는 글을 댓글이라고 합니다. 편지로 따지면 답장같은 것이지요. 영어로는 리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리플을 나쁜말로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걸 나쁜 리플이라고 악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악플보다 더 나쁜 게 바로 무플입니다. 무플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담아 편지를 보냈는데 거절의 답장을 보내는 사람보다 아예 답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밉습니다. 예수님께서 꼭 이런 꼴입니다. 그렇게 메시아로 고대하며 기다렸고, 예수님을 쫓아가며 쉴새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며 우셨던 예수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예수님,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던 예수님,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가셨을까요? 예수님은 냉담하다못해 잔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치 없기로 유명합니다. 곳곳에서 눈치 없어서 혼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했던 아이들을 쫓아내서 꾸지람을 들었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여자가 외쳐댔든지 눈치 없기로 유명한 제자들마저 예수님께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뒤에서 너무 소리를 지르니 저 여인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고쳐서 보내시든지, 아니면 쫓아내서 보내시던지 좀 보내주세요. 너무 시끄럽습니다. 제발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잔인한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은 여자의 마음에 비수를 꽃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자녀가 아프면 엄마가 드는 아픔이 어떤 아픔일까요? 부모가 아프거나 돌아가시면 슬픔마음,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상실감이 듭니다. 자신이 아프면 분노하는 마음, 서러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자녀가 아프면 엄마의 마음에 드는 마음은 바로 죄책감입니다. 엄마는 자녀를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기 때문에 괴로운 법입니다. 내가 그때 좀 더 깨끗한 음식을 먹었더라면,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살폈더라면, 아니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많이 배워서 우리 아이를 빨리 치료해주었더라면 하는 죄책감이 엄마의 사랑하는 마음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죄하며 말라가는 것, 그것이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네 아이를 고쳐줄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너 때문이야. 네가 유대인이 아니라서 고쳐줄 수 없어. 다시 말해 네가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네 딸은 그대로 살아야해. 너 때문에 네 딸이 그렇게된거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가 딸 때문에 느꼈던 그 죄책감, 그 아픔을 정확히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자는 스스로에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자는 그 순간 지옥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정신이 혼미했을 것입니다. 여자는 쓰러지듯 예수님의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자가 절을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흐느끼며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도우소서


가장 극심한 절망 가운데 우리가 주님께 고백하는 말,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아무런 수식도 없는 원초적인 고백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 말로 예수님께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그녀를 마지막으로 짓밟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서 하신 말씀보다 더욱 직접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개는 길거리를 배회하는 불결한 개를 의미하였습니다. 너에게 주어진 것은 없다. 돌아가라 너는 자격이 없다. 떠나가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파하는 딸을 위해 눈물흘리며 애통해하고 부르짖는 여인 앞에서 침묵하시고, 정죄하시고, 모욕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절하셨습니다.


여인은 완전히 무너지고, 짓밟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개들도 상에 떨어진 것을 먹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주님 저는 개같은 존재입니다. 암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욕받고 욕먹고 무시당하고 거절당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 딸만큼을 살려주십시오. 제가 완전히 죽겠으니 제 딸은 생명을 주십시오. 고백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다같이 28절을 고백하겠습니다.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딸을 사랑해서 모욕을 당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딸을 살리고자 정죄를 당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딸을 살리고자 자기를 죽기까지 포기한 사랑이었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악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 귀신들린 이 딸아이의 형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때에, 도무지 우리의 의로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조금도 쉬지 않고 외치셨습니다. 돌아와라, 돌아와라,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가 돌려드린 것은 침묵이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욕당하시고, 정죄당하시고, 심지어 저 저주받은 십자가에 매달리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죽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이 여인이 자녀의 아픔을 자신의 죄로 느끼고 고통당하였던 것처럼, 절망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자신의 죄처럼 여기시고 기꺼히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냐, 너에게는 자격이 없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스스로를 구원해봐라, 너 같은 놈이 하나님의 아들일리 없다 조롱하는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꺼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끝까지 낮추사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을 자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그 소리가 귀찮아서 여인의 딸을 치료해주자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자신의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사랑이 참으로 크구나, 여인아 너의 모습이 나와 같구나, 여인아 참 고맙다 생각하시고, 애통하시며 그 모든 시간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메시아 이십니다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가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그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사랑을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이 여인의 딸은 그 사랑의 끝에서 즉시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끝에서 모든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우리 5여전도회, 우리 성도님의 사랑은 끝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가 살고, 우리의 가정이 살고, 우리의 교회가 살고, 우리의 나라와 세상이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 길을 가는 발걸음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