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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2014.9.28. 선교회와 함께하는 예배 설교)


창세기 22장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1)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다 아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자식을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요, 모래알같이 많게 할 것이다. 그리고 본처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를 하나님께서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줄때는 언제고 빼앗아가시려 하시다니 그는 아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불과 나무를 들고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갑니다. 무려 삼일이나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아들 이삭이 물어보았을때도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해주셨을 것이다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다시피 산에 올라가 이삭을 묶고 제단에 올려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고, 네 믿음을 알았다고 말씀하시며 이삭 대신 준비된 양을 대신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칭찬하시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이 이야기는 참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는 기쁨이 크지만 그것을 빼앗아 가는 슬픔을 말로 할 수 없이 더 큽니다. 시험하실 것이 따로있지 자녀의 목숨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설령 그 자녀를 죽이고 새로운 자녀를 주신다 하여도 그 아픔은 대체될 수 있는 아픔이 아닙니다. 백자녀가 새로 생겨도 한자녀의 잃음을 평생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몰랐을까요? 그것을 알았다면 너무 잔인한 처사입니다. 비록 이삭을 죽이기 전에 양을 주셨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서 이날의 상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 중심주의와 사람 중심주의를 나누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이 어떻게 거스를 수 있느냐? 시키면 따라야지 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을 절대 군주의 모습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주신 분인데 이 내용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본문을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기 위해 특별한 믿음을 갖게 하시길 원하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결국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곧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외아들 이삭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삭마저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 19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활을 믿고 아들을 바친 것이라 해석하였습니다. 이 모두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바라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이다 바라본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삭의 순종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였습니다. 이삭이 이미 장성하였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었음에도 그 온유함으로 아버지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러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있다. 우리 또한 이삭처럼 순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 믿음 중심의 해석, 이삭 순종 중심의 해석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잔인해질 수 있는 분이신가?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시험할 수 있으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잔인하게 생명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또 부당하게 보이는 모든 말씀에 다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오늘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십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그 길을 따르겠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을 제물로 바치려한다면 그 길에 묵묵히 순종하겠습니까?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문으로 남아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고민의 실마리를 찾기위해 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성경의 다른 본문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다같이 레위기 18:21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또 신명기 12:31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명백히 금지하셨습니다. 당시 가나안 문화에서는 자기의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에 대한 최고의 충성, 신에 대한 사랑을 자녀를 인신제사 드림으로서 표현하였습니다. 나아가 번영을 위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녀를 서스럼 없이 불에 드려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당대 가나안 문화 속에서 자녀는 소유물, 재산, 수단, 바쳐도 되는 것이라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가나안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고,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 그는 어쩌면 크게 고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문화에 따라,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형태에 따라 자식을 바치는 것이 슬펐을망정 도덕적, 종교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삭의 순종 역시 이러한 문화적 흐름의 결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이러한 문화를 뒤집기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우상에 매여 자녀를 불에 사르고, 죽이는 절망과 죽음의 문화가 이어지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문화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멈추어라를 외치고, 다른 길 곧 양을 바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고, 헌신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뒤에는 우리가 드리고, 그분께 우리의 요청을 요구하는 것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기본적 특성입니다. 조상신께 제사를 드리고, 복을 받고,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드리고 복을 받고, 용왕님께 굿을 드리고 항해의 안전을 받고, 우리의 불안한 삶과 어려운 형편에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또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욕심이 극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자녀를 제사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하자 그것을 멈추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그 칭찬을 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자녀를 드려서 해주신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예전에 했던 약속을 재확인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게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복을 내려주시고, 먼저 하나님의 꿈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사주고 싶은 것들을 사주시면서 네가 이번에 말 잘들어서 주는 거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먼저 다가와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려는 것을 포기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감격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리아산이 곧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햇던 그 산꼭대기는 훗날 예수님이 매달리신 산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산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산에 드러난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사실은 무엇을 얻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멈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것, 곧 부활 생명을 받아 먹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먹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수 있습니다. 죽음의 가나안 문화를 끊고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받아들여 힘들고 험난한 시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