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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가기 (2014.10.11. 3여전도회와 함께하는 기도회)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11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우리 속담에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잘 이루어내면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겪어보니 사람들은 우리를 평가할 때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가진 차, 우리의 직장 등을 통해 우리를 판단합니다. 그 판단에 따라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요. 특별히 몇 번 무시를 당하고 나면 마음에 서운함과 화가 나기도 합니다. 제가 인도 배낭여행을 할 때 일이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계층의 사람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영어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에게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주고, 제가 허름하게 하고 다니면 저에게 참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택시가 아닌 릭샤, 즉 오토바이같은 것로 만든 운송수단을 타고 가면 호텔 밖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맥도날드 같은 곳에서도 햄버거 안시키고 콜라만 시키면 경비원이 정색을 하면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을 느끼며 아 인도는 정장을 입고 여행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이와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얼마나 많이 판단받는지,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는지가 정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어찌됬든 성공해야 하고, 어찌됬는 눈에 보기에 좋은 자리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렇게 모로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생각과 바르게 가야한다는 생각의 싸움입니다. 이 두 생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는 하나님은 내가 필요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필요한 돈을 주시는 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필요한 성공을 주시는 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필요한 안전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이러한 것들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얻어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요즘들어 예수믿는 사람들이 참 이기적이다라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와 이기적이네,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 눈에는 온통 섬기고, 봉사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들 뿐입니다. 오히려 솔직히 말하면 세상사람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지요.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것들이 더 눈에 띕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드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위해 챙겨놓고서는 하나님께서 복주셨다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원해서 높은자리에 올라놓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정한 일도 서슴치 않게 해놓고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스스로 이기적이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닌체 하면서 실상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많은 예수님 사람들은 모로가도 가기만 하면 되는 서울, 그 서울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욕심을 통해 얻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지요. 하나님을 다른 무엇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과 리브가는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과 에서를 임신하였을 때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 역시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함께 하셨습니다. 둘 모두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요, 그 분량의 차이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명심했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축복 행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눈이 멀고 영혼의 눈도 멀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돌이킬 수 없이 갈라져있는데, 이들의 관계의 회복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가 해야할 일만 아무런 생각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없음, 무신경함이 죄입니다. 리브가는 야곱만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애초부터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복을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우상은 하나님을 섬기되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은 하나님이 타고 있다고 믿었던 동물이었습니다. 말씀은 자신들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 비판합니다. 리브가는 이와같이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전형적잉 스타일이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에서는 이미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넘길만큼 어리석었습니다. 아내를 이방인들로 맞이할 만큼 하나님과는 멀어져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무감각한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온전히 받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영악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치맛폭에 쌓여 자신의 성공만을 생각했습니다. 치밀하게 에서가 가장 다급할 때 장자권을 사왔고, 어머니와 협작하여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장자의 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것을 자신이 온전히 소유하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에서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몰랐다는 점에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 모두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무감각하거나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거나 이용하려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모두 모로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복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은 바르게 가기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바르게 가기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가는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 자체에 바로 의미가 있다는 것 입니다. 아니 우리에겐 최종 목적지 천국,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부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후에 누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르게 가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가 하나님 나라임을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우리 모임가운데 예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지금 이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가족들, 특별히 리브가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머리에 손을 올리고 복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야곱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과 함께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에서도, 리브가도 그 믿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파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습니다. 속이고 미워하고 갈등하고 분열되는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은 바르게 가기에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참혹합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았으나 형의 살해위협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려 20년의 긴 기간을 노예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다시보지 못했습니다. 에서는 동생과 떨어져 20년을 후회와 미움을 교차하면 겪어야 했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이 고통은 야곱의 얍복강가의 씨름을 겪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한 사건 이후에나 참된 복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모이신 분들은 모두 어머니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어머니이자, 신앙유산을 자녀에게 전수해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녀들에게 복을 전할 수 있을까요? 아니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복이 무엇일까요? 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복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요, 삶인 것입니다. 해서 어느날 복을 얻었다하는 고백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복된 삶을 살고 있다 고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해서 모로가도 서울만 갈 수 없습니다. 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성경의 여러 번역중에 공동번역이 참 좋습니다. 제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1-3절말씀을 고백하겠습니다.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주님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아야 할 것입니다. 복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오늘 이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호주에서 헤드폰 클럽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조용한 길거리에서 모두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모두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악소리가 지나가던 저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음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춤이 그 음악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우리 여전도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세상 사람들, 우리 가족들, 심지어 우리 자신들까지도 때때로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듣고 기뻐 춤추는 사람의 춤사위와 같은 삶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 곧 복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