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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18-31 교육자료


15년 9월 2일 수요 대학부, 청년1부 통합교육 

(‣찬양: 예수그이름, 그 크신하나님의 사랑)


목적이 옳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는가? 수단과 목적은 구분될 수 있는가?

목표 지상주의에 빠져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1. 말씀 본문

(18)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2. 핵심 정리(내용 정리는 GBS 문제를 참고하세요.)


“창세기 34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지저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 가운데 하나다. 강간, 분노,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 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34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로널드 영블러드 <창세기 주석>”


(1) 하몰과 세겜


• 하몰과 세겜의 사회적 위치 – 히위족속 중 세겜 지역의 추장(레비브:가나안 도시의 세습적인 통치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


• 세겜의 범죄 

  ① 디나를 강간하고 욕되게(결혼 전 폭력적 성관계)함 (2절)

  ② 이들은 이러한 범죄에 대해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돈을 통해 해결하려고 함 (10-12절)

  ③ 디나를 납치하고 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함 (26절)


• 세겜의 기만 

  ① 야곱의 아들들과의 협상 : 함께 거주(정착), 자유롭게 다니면서 장사(상업), 큰 혼수와 예물(배상금 및 결혼지참금)

  ② 세겜 성읍민 : 거주와 장사, 결혼을 매개로 가축과 재산과, 짐승을 빼앗음


• 하몰과 세겜의 실패 – 육체적 욕망과 이익을 매개로 상황판단에 실패하고, 시므온과 레위에게 역으로 속아서 살해당함. 성읍이 노략질 당하고, 성읍민은 노예가 됨


‣ 하몰과 세겜은 당대의 가나안 문화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정결과 거룩에 대한 개념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여인을 겁탈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고, 이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여인을 사실상 사서 아내로 삼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다른이들과의 협상에 있어서도 정직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를 기만하는 일을 쉽게 실시하였다. 그들에게는 할례 역시 이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거룩과 정결의 표징이었던 할례를 역설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한 과정으로 수용하였으며, 그 결과 자신의 욕망에 덫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고 나아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 없는 문화의 최후를 예표한다.

  

(2) 시므온과 레위


•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 

  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와 같은 어머니를 가진 형제들이었다. 야곱은 그들의 어머니인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 시므온과, 레위, 디나가 서로에게 갖는 애정은 더욱 특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시므온과 레위는 격분하였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야곱이 잠잠한 모습을 보면서 더욱 격분하였을 것이다. (‘듣고’는 듣자마자로 ‘근심’은 분개로 해석할 수 있다.)

  ② 디나의 강간은 정결과 관련된 단순한 도덕적 사건을 넘어서 종교적 사건이었다. 세겜의 범죄는 개인들간의 범죄를 넘어서 종교적 죄악에 속하였다. 성경은 이 일은 부끄러운 일로 묘사하였다.(7절) 이에 따라 이들은 종교적 열정에 기반한 분노를 표현하였다.


• 시므온과 레위의 속임수 

  시므온과 레위의 속임수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성격의 분노가 섞여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들은 그들의 수치(14절)를 씻고자 하였고, 디나가 당한 아픔을 갚아주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할례를 요청하였고, 할례를 통해 고통당하고 있는 그들을 죽여버렸다. 복수에 눈이 먼 그들에게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 생명에 대한 존대는 찾아볼 수 없엇다. 이들의 이러한 속임수는 결과적으로 그들이‘할례’를 자신의 폭력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과 약탈

  시므온과 레위는 단순히 하몰과 세겜만을 죽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남자를 죽이고, 다른 형제들을 불러 성읍을 노략하였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읍에 있는 것들과 들에 있는 모든 재물을 빼앗았으며, 그들의 자녀와 아내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고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취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결국 탐욕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정결례적인 전쟁도 아니고, 동생의 복수를 위한 명예 전쟁도 아니었다. 이 전쟁은 탐욕과 이익에 눈이 먼 야곱의 아들들의 약탈전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죽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이들의 물건을 약탈하였다. 


‣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전쟁은 매우 많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위한 전쟁이기 보다 인간의 탐욕을 위한 전쟁일 경우가 훨씬 많았다. 비단 전쟁이 아니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빙자하여 인간의 탐욕과 우상을 위한 일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또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가장 큰 우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이는 우상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정결함과 거룩함이 더렵혀진 동생으로 인해 분노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세겜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뿌리깊은 분노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존재하였다. 아버지로부터 차별당한 어머니와 소외당한 자녀들의 아픔이 그것이다. 심지어 강간을 당하고 돌아와도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무정함은 오랜 세월 그들 안에 눌려왔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한 허전함과 분노를 살인과 약탈을 통해 풀어버렸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그 모든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할례를 자신들의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수많은 생명들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제거하였다. 그들의 분노는 마지막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디나를 아버지의 딸이라 표현하지 않고, 우리의 누이라 표현하며 아버지의 무책임함을 지적하였고, ‘창녀’라는 표현을 통해 야곱이 고작 딸의 모욕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던 모습을 비판하였다. 결국 그들은 아버지에게 사태를 이렇게까지 끌고간 책임을 되물으며 갈라진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이 사태를 통해서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분노는 결국 요셉의 사건에서 다시한번 재현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요셉을 팔아치운 장소가 바로 세겜이다.) 


(3) 야곱


• 야곱의 냉담함 

  야곱의 편애는 뿌리가 깊다. 그의 편애는 밖으로는 그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에서, 안으로는 뿌리깊은 자기애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투쟁적 관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에 집중해왔고, 이러한 관계 안에서 자기 중심적 사고를 뿌리 깊게 발전시켜왔다. 그는 자기가 사랑한 사람을 사랑하였고,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편애의 상처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레아와 라헬은 그녀들의 종 실바와 빌하를 동원하면서까지 사랑의 구걸을 해왔다. 레아가 차별받은 서러움을 그 자신들의 이름에게까지 부여하면서 표현한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야곱의 차별을 보여주는 정점에는 요셉이 있는 데, 요셉의 일그러진 성품과 다른 아들들의 분노와 폭력성은 이러한 차별의 폐해가 그대로 그러나고 있다. 본문의 사건에도 야곱의 편애는 그대로 드러난다. 야곱은 딸이 강간을 당한 뒤에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잠잠하였다. 이것은 그의 차분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딸을 향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는 딸의 명예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향후 협상에서도 아무런 분노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서 소극적인 모습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 야곱의 비겁함 

  본문에서 나타난 야곱의 발언은 30절이 유일하다. 그는 이러한 사태 중(디나의 강간,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문제)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다가, 세겜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난 뒤에서야 아들들을 책망한다. 그런데 그의 책망의 초점은 대량 학살을 했다거나, 할례의식을 악용했다거나, 계약을 어기고 신실하지 못했다는데 있지 않았다. 그의 비난은 오히려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데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의 자녀들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공격을 받을까에 대한 비난이 먼저였다. 그는 에서와의 관계에서 보였던 일관적인 태도인 비굴한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은 결국 가정을 파국으로 이끌었다. 


‣ 야곱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커다란 믿음을 보였던 것에 비해서, 심지어 이삭이 우물들을 옮기며 보여주었던 온유함에 비해서 그는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악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그를 통해 나아가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부족하고, 죄악이 많은 이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에 쓰시고자 약정하고, 그 길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죄 많고 어리석은 이들이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모든 이들이 구원으로 초대받았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복은 야곱의 선택과 의로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하심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직면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4) 예수 그리스도


• 악을 대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 

  시므온과 레위가 했던 분노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했던 분노의 차이는 그 분노의 근원이 무엇이었느냐에 있다.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에는 뿌리 깊은 상처가 있었다. 편애하는 아버지로부터 온 상처, 사랑받지 못함에서 오는 결핍에서 오는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한 왜곡된 형제애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돈으로 바꾸는 자들에 대한 분노, 율법과 교리, 종교의 틀 속에서 하나님을 잃게 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셨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아픈자들과 함께하며 불의와 죄악에 대해 분노하셨다.


• 악을 대하는 예수님의 희생적 방식 

  그러나 시므온, 레위와 예수님의 극명한 차이는 이러한 악에 대해 대항하는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폭력과 약탈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맞고 찢기고, 빼앗기고 죽는 방식을 선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죄악과 수치, 더러움과 모욕을 기꺼이 자신이 짊어지시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감당함으로 악에 대항하셨다. 그는 오른빰을 때리는 이에게 왼뺨을 들이댔으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셨다. 가장 비천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다. 


•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특별하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믿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1차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셨음을 의미한다. 보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십자가를 통해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았던 방식이 오해였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참으로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과 참 교제를 이루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한다. 더 강한 것, 더 큰 것, 더 위대한 것, 더 부유한 것에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들마나 더 큰 종교 상징물을 짓고, 종교의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종교의 권위를 표현하는 교리와 법전을 만들고, 종교의 영적 능력을 보여주는 신비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호하게 이러한 것들을 거부한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는 것, 자신을 내려놓는 것, 자기를 희생하는 것, 자기를 죽이는 것 안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감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에 자신을 못 박는 것이 곧 부활 생명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목적이자 수단이 된다. 


‣ 우리는 때때로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는 오류를 범한다. 복음을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이라는 틀 안으로 한정시키고, 그 수단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세속적 방식을 차용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여야 한다. 복음은 복음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은 삶 그 자체가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하는 삶이기 때문데, 복음을 전하는 방식 역시 십자가와 부활의 방식일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일상의 삶을 통해서, 모든 순간을 통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와 능력에 의해 드러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반응할 때 드러나시는 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분의 은총이 정직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겸손하고 정직한, 그리고 상한 마음을 드려야 한다.   


(5) 생각해 볼 문제 

•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일까?

• 목적과 수단이 일치되지 못할 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교회에서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3. 기도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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