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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예수 (2019.12.08.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1장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지난 주에는 예수님의 족보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의 성취, 다윗과 했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족보를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가득한 우리의 역사와 삶을 통해서 일하셨고,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실수가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이 오늘 말씀에서 마침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한가운데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다같이 오늘 말씀 21절을 봉독하겠습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아이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여호수아’, ‘예수아’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면서, 예수님의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름’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이심이라. 
오늘 우리가 대림절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면서 설명한 첫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도한 예수님에 관한 첫 설명서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백성을 자신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
=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이 뜻을 우리가 해석하기 위해선 먼저 ‘죄’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죄인’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교사회였습니다. 유교사회에서도 ‘죄’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의 뜻은 해야될 도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삼강오륜, 부위자강, 부위부강, 군위신강,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옛날 도덕시간에 배운 것들인데, 임금과 신하로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어른과 젊은이로서, 친구로서 마땅히 해야될 도리, 그 도리를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도 죄인이지? 넌 되먹지 못한 사람이지?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이지?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죄인’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잘못을 한 것도 죄인이라고 말씀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 죄라고 할 때 여러 단어가 사용되지만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구약의 단어는 ‘차타’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와 같은 의미인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차타, 하마르티아 이 단어의 원 뜻은 표적에서 벗어나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살을 쏘았는데 정확히 맞지 않고 엉뚱한 데에 맞은 것을 차타, 하마르티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지 않고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의 첫 이야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이란 동산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서 살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셨는데, 단 하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금지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네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눈이 밝아질 것이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절대 죽지 아니할것이다 꼬득였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자기만 먹었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인류의 첫 번째 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셨는데 딱 하나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를 골탕 먹이시려고 모든 것을 허락하시곤 선악과만 먹지 말아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하나님을 떠나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히브리어 단어는 토브와 라 인데, 그것은 좋다. 싫다의 뜻을 갖고도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좋은 것은 좋은 데로, 내가 싫은 것 싫은 데로 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탄은 이것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 우리에게 꼬득였습니다.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한다면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되는 것 마냥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악과를 먹게된다면 죽을 것이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뜻대로만 살면 결국 그 선택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 이제 제가 좋은데로 살겠습니다. 하면서 아버지를 떠나게 된다면 얼마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빠지고 심지어 생명이 위협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선택하게 되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죽음에 빠지게 한다는 가르침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였습니다.

뿌리에 붙여있는 꽃만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잘라서 물에 담가놓으면 잠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죽고 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뿌리와 같은데,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꺾인 꽃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 하나님 찾기를 싫어하는 존재, 우리 뜻대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생명,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사랑, 이러한 것들을 돈이나 안정된 삶, 당장 삶에서 필요한 것들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 같아서, 당장은 안정과 평안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바로 무너지는 위태로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평안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은 늘 우리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안정되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조금 더 확실해지기 위해서 더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그 저주, 생명을 키워내려고 애쓰는 데 그 밭에서는 엉겅퀴가 자라나고, 생명을 낳으려고 애쓰는 데 그것이 엄청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일이 우리의 매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곁에 있는 이웃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짜증내는 일이 매번 발생하고, 더 나은 삶을 찾아 애쓰는 데 더 삶이 어려워지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 뭔가 우리의 삶이 어긋나있다라고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인 것입니다. 

죄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아가고자 애씀으로 발생하는 모든 어긋나있음이 곧 죄입니다. 그렇기에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라는 고백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회개합니다. 라는 고백은 주님 이제 내가 주님께로 제 마음을 돌리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요?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예수님(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 없는 어려움 속에서 헤메이며 고난과 슬픔과 죽음을 겪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건져내어 하나님을 다시 보게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회복시킬 것입니다.
구원이란 다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이곳에,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백성을 자신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마태복음은 바로 이어서 구약의 예언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구원이 무엇이냐?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고아와 같은 우리들이, 과부와 같았던 우리들이, 나그네와 같았던 우리들이 마침내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남편, 우리의 왕, 하나님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 혹은 하나님께서 이정도 하면 나를 이정도 도와주시겠지 우리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지고, 병이 낫고, 혹은 성공하고 하는 이러한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한 경우에도 떠나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을 완전히 최고의 것으로 책임지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와 붙어있는지, 내가 죽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며, 예수님처럼 나도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진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껏 나홀로 살아가며 고군분투했던 삶, 불안과 두려움이 늘 엄습했던 삶, 성공과 인정만이 나를 세워줄 것라고 생각했던 삶, 교만과 열등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던 삶 

이러한 삶에서 내 존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확인받고, 하나님 때문에 진정한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생애를 통해 일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기꺼이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삶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나, 내가 바라보는 나의 삶, 내가 바라보는 모든 세계가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새벽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이 곳에 와서 진실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2000년전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그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직접 손으로 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돕는 것보다 더 좋은, 사실 가장 좋은 것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서서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아픔을 느끼고, 같이 그 길을 걸어가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귀한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은 입장이 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그저 머리로만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제 제가 이제껏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온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고백하오니,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하시고, 내 모든 인생 가운데 함께하시고 계심을 진실로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