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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기들, 예수님 (2019.12.22.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장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루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에게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러 함이러라

캐나다에 와서 참 좋았던 것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집들을 예쁘게 꾸미고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주택가를 천천히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집집마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꾸며놓은 장식들이 조용한 주택가의 밤을 수놓은 것이 정말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저 문화에 따라 꾸며놓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 곳 사람들은 차분히 성탄절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맞이한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기뻐하고 찬양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음의 위협으로 맞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한 헤롯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왕은 동방박사들로부터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권위 있던 박사들이었던 그들의 말은 헤롯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은 처음에는 동방박사가 태어난 아기를 알려주면 찾아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는 헤롯왕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꿈에서 그들에게 알려주지 말고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 지역의 모든 두 살 아래의 아기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를 선포하기 위함이었는데, 세상은 예수님을 전쟁과 같은 비극으로 맞이하였습니다.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의 이유가 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대리점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프랜차이즈를 보면 본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영점이 있고, 여러 권한을 주고 대신 일종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대리점이 있듯이 로마제국도 자기 제국을 다스릴 때 직접 총독을 보내어 다스리는 지역이 있었고, 그 지역의 왕을 이용해서 대리 통치를 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헤롯왕은 일종의 대리점주였던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재판을 담당한 빌라도는 직영점 같은 총독이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이 로마 제국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그의 불안은 더욱 커져버린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해칠 수 있다는 불안감. 내가 쫓겨날 수 있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두려움이 생길때 우리를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 예는 헤롯의 비극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시리아에서 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시리아에는 두 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수니파와 소수종파(13%)였던 알라위 시아파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알라위 시아파는 수니파의 박해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시리아를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이 알라위 시아파를 대거 관리로 임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수니파를 다스렸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받았던 박해를 기억하며 가혹한 통치를 했습니다. 문제는 영국이 떠난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게 되면 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50년동안 권력을 쥐고 내려놓지 않았을뿐더러 북한처럼 세습을 해서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중동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시리아에서도 정권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사드는 단호했습니다. 만약 어느 한 마을에서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마을을 폭격기로 폭격해버렸습니다. 나라는 전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시리아는 엄청난 비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8년째 진행되고 있고 무려 37만여명이 죽었습니다. 그중 어린이도 2만여명이나 되었습니다. 2100만명 국민 중 1200만명이 피난민이 되었고 570만명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권력을 쥔 자가 불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권력은 엄청난 폭력이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두 번째 이유는 교만과 무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무죄한 어린 아이를 죽이려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범죄였습니다. 그 죽음에는 수많은 죄악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의 가치를 짓밟음으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각각의 아이를 통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그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마음에 폭력을 가함으로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베들레헴은 그날 그의 조치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이러한 절망과 고통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권력의 안정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죄악에 깊이 물든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감하지 않는 것, 오직 자기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 수치에 불과하다. 권력에 완전히 함몰 되었을 때 어마나 인간이 얼마나 큰 악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병 고쳐주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종교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 없음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몸이 오랫동안 아파온 사람의 고통에 공감했더라면,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쉽게 윤리적 잣대, 종교적 잣대로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종교적 법칙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나 발가벗겨지고 몰매를 맞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그 길을 첫 번째로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을 보고 피해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로 지나간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도 그냥 피해 지나가버렸습니다. 사회적, 종교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이들은 모두 그냥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정작 그를 치료해 준 사람은 당시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사람취급도 하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에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마도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져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사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 연민하는 마음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그것이 교회와 신앙을 위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고,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악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기의 권세와 안전을 위해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고통당할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 이것이 헤롯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헤롯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에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않는 죄악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민들이 발생합니다. 환경 파괴는 점점 심해져서 지구 온난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1,5도 상승, 10년마다 0.2도씩 상승, 2100년까지 3.5도 상승, 6도 상승하면 모든 생물이 멸종)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칵테일 새우, 나이키 축구공)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 교만함과 무정함이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만들어 놓은 고통과 슬픔이 지금 세상 가운데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 시대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예수님이 맞이한 현실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홀로 맞이하셨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 가운데 참된 희망을 보이시기 위해 예수님을 먼저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폭력과 죄악을 온몸으로 받아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이세상이 악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나, 이제 이 세상은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승리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위에서 오늘 이 곳에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가운데 빛을 드러내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기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들레헴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헤롯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세워갈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갈 때 우리들의 삶은 이전의 세상 방식과는 다른 삶이 될 것이요, 세상을 변화시킬 삶이 될 것이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베들레헴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길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우리의 연약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앞길을 알 수 없고, 상황과 환경의 변화를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늘 근심하고 걱정하곤 합니다. 어떻게 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사업체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내가 속한 직장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리 가정을 잘 부양할 수 있을까? 자녀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까? 내 건강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삶을 잘 지속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때에 우리가 이 불안과 어려움을 떨쳐낼 길이 전혀 없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역할을 하셨나요? 무려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힘도 없는 갓난아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강보에 싸여서 젖을 먹고, 잠을 자고, 울고, 기저귀를 적시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인도하셨습니다. 헤롯의 공격을 피해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자라게 될 나사렛 지역까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무사히 사역의 순간까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힘과 능력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인 헤롯은 자기 뜻대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그는 빈털터리로 자수성가해서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고, 6번 결혼했는데 가장 사랑했던 아내와 두 아들, 장모까지 죽인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난 뒤 몇 년 되지 않아 극심한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어 보였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무사히 지켜질 수 있었고, 모든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헤롯은 결국 자기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더러 끝까지 불안해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몇몇 문헌에서는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상황과 조건, 자신의 능력의 부족함이 헤롯을 삼킨 것이 아니라 결국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집어 삼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삶을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늘 붙들려 있는 존재임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린 존재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에 우리의 시선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낸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던 마음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헤롯의 위협과 피난을 가야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연약한 아기를 끝까지 붙잡아주시고 인도해주셨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 가운데 연약한 아기로 오셔서 기꺼이 죽음의 위협을 감당하셨을까에 기울여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꺼이 아기로 오게 된 바탕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애통하고 아파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전쟁과 침략으로,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애통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담은 말씀입니다. 베들레헴의 예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다름 아닌 베들레헴에서 살해된 아기들, 그들의 죽음에 절망하고 슬퍼하던 그 어머니와 가족들, 그 죽음과 눈물의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이 모든 눈물과 애통함, 죄악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절망을 해결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말씀입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그대로 병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고치시고,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자들을 이웃으로 초대하시고, 죽은 아이들을 살리시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르치시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이 모든 이들의 슬픔과 이 슬픔을 가져온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이 처음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며,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아가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을 돌아보는 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무정한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너희 아버지가 다 아신다. 우리는 이제 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삶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먹고사는 일에 온 마음을 쓰다 죽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담대하게 우리의 삶을 주님에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가족,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교회 식구, 더 나아가 서리 지역과 한국 지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 더 나아가 여전히 이 세계 곳곳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 여인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애통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전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탄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작은 불빛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트리가 되듯, 우리의 이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 모여서 예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