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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응답 (2019.12.15. 주일설교)

마태복음 2장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오늘 말씀은 참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보통 이 말씀을 나눌 때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 세 보물을 바치는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하심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저 역시도 늘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늘 누리고 싶습니다. 기도할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느끼고 싶고,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늘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만나야 한다 말씀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 같은데 나 자신을 살펴보면 그러한 경험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확실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질문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은 시간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 임하나요? 하나님 언제 즈음 저를 만나주실 예정이신가요? 하나님 언제 제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나요? 하나님 언제 제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을 갈망하며 ‘언제’를 품고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장소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나요? 이 장소는 실제 장소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의 자리, 마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제가 어느 자리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나심과 그 나심 가운데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우리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먼저 우리의 첫 번째 질문, 언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까? 언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찾아와 주시나요? 대한 질문의 답을 함께 찾아가보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인도를 여행하면서 한 잡지를 읽었습니다. 그 잡지는 인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사잡지였습니다. 그 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룬 기사였는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다룬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 중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를 처음 믿게 된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인도의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병에 걸려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도 속수무책이었는데, 어느날부터 소문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신이 있는데, 그 신에게 기도를 하면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힌두교 신 옆에 예수 신을 위한 제단을 차리고, 예수 신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이 늘어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다른 지역에 있던 선교사님과 목사님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지역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들은 순교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낫게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정작 그리스도인들이 힌두교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교회가 파괴되고, 성경이 불타고,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 참 의아했습니다. 앞서 일하셨던 하나님과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하나님이신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일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사실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전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보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갖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차별하시는 것은 아닌가, 혹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것은 맞는 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음이 흔들릴때는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바로 기도응답을 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화가 나거나 냉소적인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 없이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만나주시는 부분에 대해서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도 이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구약의 말씀, 말라기가 선포된 지 벌써 400여년이 지났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는 메시아께서 우리에게 오시겠지 생각했지만, 오늘 이곳에 오실거야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 3~6절 말씀입니다.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성전에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허둥지둥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찾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거라고 짐작하였을 뿐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 기다리다보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기다림에 지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다림’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도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뒤에도 2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요셉도 꿈을 꾼 뒤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모세도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한 뒤에 40년을 광야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다윗도 왕으로 기름을 부음 받은 뒤에 오랜 세월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소년이었던 다윗은 40살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후로 거의 500년이 다 되어서야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심으로, 기다리게 하심으로 일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기다림’이 주는 유익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인생을 우리 손아귀에 쥐려고 합니다. 빨리빨리 모든 것이 처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지요.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하고, 생각하는 데로 다 처리되어야 하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바로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상당히 사람의 본성에 가까운 나라, 캐나다는 상당히 멀리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빨리빨리의 문화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내 뜻대로, 내 맘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자판기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하나님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이 되시길 거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포장된 우리의 욕심, 자랑, 바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 진실로 만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 시간을 통해 겸손하게 하시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우상을 내려놓게 하시며,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침묵’과 ‘기다림’을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 오랜 기간 하나님께서 아무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기다림’을 가르쳐주고자 하신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기다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어리석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기다림에 지쳐서 무엇을 기다리는 지조차 잊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기다림을 통해 일하신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중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림’을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그 기다림의 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시간, 혹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 역시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함께하시는 시간, ‘기다림’을 선물로 주시는 시간, ‘은혜’와 ‘사랑’으로 여전히 함께하시는 시간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구원이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다라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의 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서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에서 우리와 더불어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이 땅을 통치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만나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가?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답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 기다리는 시간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순간이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는 시간이요, 뜻을 이루어가시는 순간이다. 임마누엘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만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나요?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선택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합니다.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지, 어디로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일지를 늘 고민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가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계실 만한 곳’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들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통한 페르시아나 바벨론 지역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별을 발견하였고, 그 별이 새로운 왕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별을 따라서 서쪽으로 와서, 유대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역에 다다라서는 그들은 별을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왕은 마땅히 왕궁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국에 들어가 태연하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냐 물었습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왔음에도 끝에 와서는 별을 따라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이 선택은 물론 틀린 선택이었습니다. 그저 틀린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의 단초가 되어버린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에 조심해야 할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통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 말씀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니라

우리의 눈은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보다 우리의 죄로부터 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하나님을 찾아 길을 나서 한참을 가다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궁에 눈이 팔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 들어가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육체가 좋아하는 것, 우리의 눈이 좋아하는 것, 우리의 마음이 자랑하는 것,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야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자랑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것에 슬쩍 하나님을 끼워넣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자랑합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많은 교인수를 자랑합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열심과 헌신을 자랑합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영적 체험이나 신비로운 기적들을 자랑합니까, 그러나 예수님보다 그러한 것들을 더 자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가다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 버리는 동방박사들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1~12절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시며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서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지진 가운데에서도 계시지 아니하셨으며,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서도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람, 지진, 불,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당대의 우상들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오히려 세미한 음성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왜곡된 시선 안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장소에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주 작은 마을에 가축 우리, 가축들이 먹던 그릇인 구유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바로 이곳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대가 무너진 자리, 우리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 근사한 것, 화려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자리, 그곳에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아주 작은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울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첫장면이었습니다. 그곳엔 하나님의 능력이나 권세, 하나님의 위엄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이 땅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마주쳐야 할 것은 이 주님의 겸손한 사랑입니다. 그곳에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먼저 동방박사처럼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징조입니다. 우리에게 별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예수님으로 인도해주시는 성령님과 성경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누구든지 성령님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별, 곧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경 말씀을 따라가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시선입니다. 그것은 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주목할 때.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목할 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과 자랑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주님을 통해 나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할 때, 헛된 것들을 추구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시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시지 않으셨고, 권력의 상징인 예루살렘 왕궁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찾아 가야할 길은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입니다.

이제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을 사랑합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훗날 예루살렘은 예수님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다림’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죄된 욕망과 자랑대로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비우고 낮아져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기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다림’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대로 모든 기도를 응답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저버린 채 예루살렘에 더 큰 궁전과 성전을 짓고 살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벽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자 마음에 소원을 품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까 고민중이십니까? 우리 함께 주님이 허락하신 ‘기다림’을 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하며 주님을 더욱 간구합시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별을 바라보고 메시아를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더욱 말씀으로 나아갑시다. 무엇보다 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욕심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사랑의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이 모든 과정을 임마누엘의 시간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