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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2019.12.29.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3장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제 한해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한해를 생각해볼 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늘 아쉬운 마음이 들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은 늘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의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온 삶으로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다른 사람과의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그저 기다리고 있었지만, 세례 요한은 자기의 모든 삶을 기다림을 위해 적극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다림 끝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예언한대로 예수님을 준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온전히 맞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심지어 박해하고 죽이려던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그 뜻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는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의 삶은 모든 것이 완벽했을 수는 없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했을까요? 먼저 세례 요한은 광야 생활을 통해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다같이 1~4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삶입니다. 광야에서는 비축해둔 식량이 있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광야로 나서는 것은 죽음을 매 순간 얼굴 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민생활도 비슷) 그래서 광야에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신 이유도 이와 같았습니다. 신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홀로 살 수 없는 상황,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자기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깊이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최소한의 삶의 필요만을 채우며 살아갔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말린 메뚜기와 돌과 돌 사이에 낀 석청을 먹으며 살아갔습니다. 최소한의 옷과 음식만을 먹으며 하나님께 집중한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세례 요한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헛된 것들로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곧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데에만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게하고, 우리의 마음을 부풀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때에게 가능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마음을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공급에 마음을 기울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에 가능합니다. 세례요한은 이 놀라운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삶을 칭찬하시며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광야의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7~10절 말씀입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세례 요한은 그를 찾아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비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거짓과 속임수에 능한 자식들아.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너희의 종교적 지위를 사랑하고,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네 삶의 중심이라고 고백하면서 사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지 않느냐?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 곧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너희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여기 굴러다니는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도 하시는 분이다. 너희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신앙의 순정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비판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설 것을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약하면 세례 요한은 광야 생활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고, 회개의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모습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너무 멀리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광야에 나갈 수도 없고, 낙타털 옷을 입고 다닐 수도,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살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중세 교회 때에는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 광야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한평생 자기의 삶을 내어드린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수도원의 전통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헌신은 많은 이들의 신앙에 귀감이 됩니다. 저도 이전에 4박 5일정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생활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4박 5일정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밥먹고, 일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자 할 때 이러한 시간들을 가져보는 것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일상을 살아야 하고, 회사를 다녀야 하고, 육아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이러한 일 가운데 있고,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더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살면 하나님께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느냐에 관한 질문이 드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광야 생활을 하는 것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도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점점 고행을 극단적으로 하기까지 했습니다. 또는 거꾸로 재정적으로나 성적으로 부패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들은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야 했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을 봉독하겠습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 그가 하나님께 집중한 것, 그의 하나님 사랑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아주 작은 사람이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서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천국, 곧 하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회복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이제껏 모든 사람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어. 세례요한의 시대까지는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야 했다면, 이제는 나의 시대에는 너희를 찾아온 하나님, 곧 나를 받아 들이면 된다. 너희가 만일 내 안에 있게 된다면, 너희가 나를 믿고, 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세례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비판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뜻을 더욱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우리의 가정, 우리의 회사, 우리의 관계,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훌륭한 기독교인이야 착각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한다고 해도 다시 또 돌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이러한 비판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기 보단 하루하루 삶을 버텨내기에 급급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잡고 있는 우상을 놓지 못해 떨고 있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살고 있을 때, 예수님을 준비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어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계명들은 잘 지키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전부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하신 것입니다. 네 삶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라. 네가 사랑하는 모든 걸 포기해라. 이 청년은 근심하는 얼굴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 어렵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럼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과연 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어있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세례 요한 조차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것을 붙잡고,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번 후회하고, 매번 반성하고, 매번 회개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세수하듯 얼굴을 매일 씻을 수는 있으나 얼굴을 늘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신앙을 잘못 오해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집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한 벌 옷을 입고, 성지 순례를 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때리며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욕심을 버리고, 자기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높은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서 수십년을 버티며 홀로 살며 자기 욕망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오늘 말씀 11절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상징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례는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세례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있다 말씀하시며, 그래서 내가 널 먼저 사랑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있다 말씀하시며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늘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있다 말씀하시며 부활로 진정한 소망을 너에게 보여주었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진실로 기다리고 예비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되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의 자격없음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자격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우리를 자책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0절 말씀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잘 준비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은데, 기꺼이 찾아와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며, 완벽하지 않은 믿음을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그리고,내가 너를 먼저 사랑하고, 먼저 함께 하고, 먼저 믿어주겠다. 너는 내 사랑 안에서, 내 믿음 안에서, 내 소망 안에서 조금씩 나를 닮아가면 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성령 안에서 변화시키고, 보혈 안에서 변화 시키시는 것입니다. 

어느날 사람들이 와서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때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신랑, 곧 하나님 되신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 은혜의 깊이를 맛보아 알아갑시다. 그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감격이며 기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광야로 내모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열어주신 잔치에 참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 순간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격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한계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놀라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이 있을 수는 없으나, 하나님 나라를 깨달은 사람은 가장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입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새해를 준비하면서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고민하시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음을 더 굳게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를 더욱 알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더욱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에 더욱 붙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포함한 우리 새벽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은혜 붙잡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