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2020.02.14. 금요기도회 설교)

에베소서 2장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구원을 받기 전 우리의 모습, 우리를 주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1장을 통해서 찬양과 기도를 통해 놀라운 주님의 구원을 선포한 뒤,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 설명은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 사도는 첫째로 죄인된 우리가 어떤 운명이었는지를 말씀하였습니다. 다같이 1~3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의 운명을 한마디로 ‘죽음’이라 표현합니다. 비록 육체는 살아있어도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모든 인류에게 처해진 육체적, 정신적, 영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를 수 있지만, 저는 죽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절망과 허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잠시 잠깐 가질 수 있고, 무엇인가 잠시 잠깐 누릴 수 있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 그것이 죽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음을 묵상하면, 우리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게 까지 이르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까뮈는 이러한 고민을 그의 유명한 책 ‘시지프스의 신화’로 표현하였습니다. 인생을 잘 보니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와 같은 저주에 빠져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가 받았던 저주는 산꼭대기에 돌을 올리는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애써서 돌을 산꼭대기에 올리면 그 돌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해야만 하는 저주가 시지프스가 받았던 저주였습니다. 우리 인생도 끊임없는 숙제의 연속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자식들 키우는 문제,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 해결되지 않는 숙제들이 계속해서 밀려오고, 그것을 버티고 살아야하는 게 우리의 운명과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면, 우리의 인생과 삶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사실 우리가 죽는다는 것과 그리고 그 죽음이 우리 삶을 절망과 허무로 이끈다는 마음 속 깊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직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현실에 집중하고 집착하며 살아가게 되곤 합니다.

죽음과 반대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죽음을 잠시 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명을 향한 목마름을 잠시 잠깐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풍조입니다. 두 번째는 공중 권세 잡은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죽음을 잠시 잊고 살아갈수 있도록 중독 시키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욕망할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좋은 핸드백, 좋은 전자기기, 좋은 집, 좋은 차, 세상적인 성공, 육체적인 쾌락, 무엇인가 우리의 눈에 좋고 마음에 좋은 그것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진실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지요. 가슴이 뛰고, 흥분되고, 기쁘고, 행복함을 느낍니다. 욕망은 죽음을 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세상 풍조는 이러한 욕망을 잘 조직하고 제공합니다. 욕망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세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금은 수많은 금속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쇠를 볼 때의 마음과 금을 볼 때의 마음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와 방식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무엇인가를 늘 우리의 우상을 만들려고 하고, 그 우상을 따르는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세상의 풍조에 잘 화답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만족감을 얻게 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아가 세상 풍조와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악한 권세, 곧 사탄의 유혹으로 자극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사탄이 예수님에게 와서 했던 세 가지 유혹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혹입니다. 악한 권세는 우리가 세상의 풍조와 내 안의 욕망만을 따라 살도록, 그래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거짓과 속임수로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죽을 운명에 처해졌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다른 것을 찾는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죽이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다같이 4~7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죽어가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있는 줄도 알지 못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큰 사랑으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복음의 신비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때 그것은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라 곧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도 함께 예수님과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선포합니다. 로마서 6장 3절 말씀입니다. (새번역)

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때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이미 허물과 죄를 통해 죽었던 사람이라 말씀은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죽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이미 죽어있으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 사람의 죽음입니다. 욕망대로 살고, 세상 풍조대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 살아가면서 느끼는 ‘잠시 잠깐의 살아있음’을 생명이라고 착각하던 사람의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입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렇게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 그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도록 옛 사람을 보내버리신 것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를 새롭게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더 놀라운 고백을 하는데,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를 승천시키셨고, 우리를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고 선포합니다. 우리와 주님이 연합되었기에 우리는 주님이 승천하실 때에 함께 승천한 존재가 되었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지금 우리도 그분과 더불어 예수님의 다스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 오직 말씀을 통해 영적인 눈으로 믿어야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일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 현실을 부딪히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이며, 하늘에서 선포하시는 그분의 뜻이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은 비록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이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을 잊기 위해 욕망과 세상 풍조와 악한 권세에 굴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내 사랑 안에 있다. 네 삶은 나의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삶은 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 가운데,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저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가 지극히 풍성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또 오는 모든 세대에게 알리고자 그 일을 하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때때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죄악과 허물을 짓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주님을 알기전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주님의 죽음과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8~10절까지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은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그리하여 죽음을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연합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롭게 영생을 누리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자격이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지만, 그 믿음 마저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와 찬양과 사랑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놀라우신 일,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일을 깨달은 사람은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구나. 이전의 나는 이제 없구나, 나는 새사람이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사신 일이 그저 2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죽고 내가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나를 향한 주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구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갖는 일이 우리의 종교적 지식이나 종교적 권위를 갖는 일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를 다시 높이고, 자랑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보다, 다른 그 무엇을 더 앞서 두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주님이 하신 이 놀라운 사랑과 자비와 은혜에 깊이 반응하고 그 일에 온전히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죽음 앞에선 우리는 우리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욕망과 세상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자에게 복종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 삶을 살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가리고 이웃을 해치며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주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인정받고자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 사랑의 일, 정의의 일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주님이 주시는 선한 욕망으로 바뀌어 갑니다. 세상의 풍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공중 권세잡은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살아갑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며,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드러납니다. 기쁨과 평강과 하나님의 정의가 선포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조선 시대 왕중에 철종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강화 도령이라 불렸는데, 공부도 전혀 하지 않은 채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엔 세도 정치가 극성인 시대라 이러한 사람을 불러다가 왕에 앉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몇 년간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 몇 년 후에는 제법 깊이 있는 정치를 잘 해낸 왕이 되었습니다. 비록 당시 시대가 불안한 시대라 한계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위치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벽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늘 우리의 욕망과 세상의 풍조와 악한 권세의 유혹 앞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해서 그분과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놀라운 신비를 매순간 묵상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진실로 바라보아야 하며, 나아가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주관하셔서 인도하십니다. 주님께 늘 간구함으로 우리에게 임한 이 놀라운 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