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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2021.06.20.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22:15~22)

 

마태복음 22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우리는 지난 주까지의 말씀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유대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갈등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비유 말씀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에 유대 지도자들은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모든 일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훼손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흔들며, 나아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5 말씀입니다.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첫번째로 행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것을 공공연히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의 권위를 흔들자 놀랍게도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앞장섰습니다. 그들의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그들은 그들의 행동으로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의 실수를 유도하여 올무,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정치인들이 상대방의 말실수를 유도하고 이를 꼬투리 삼아 흔드는 경우는 매우 흔히 쓰이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예수님을 흔들었는지는 이어지는 말씀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16, 17 말씀입니다.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6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그들의 위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었고, 헤롯 당원들은 로마에 철저히 순응하고 협조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조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과 기름과 같은 두집단의 사람들이 힘을 합친 것입니다. 조합은 오로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말씀과 성전을 모욕했다고 생각하였고,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질서를 흔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교묘한 말로 예수님을 흔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진실되시고, 오직 진리로만 하나님의 도를 가르시치고, 어떤 사람에도 매이지 않는 분임을 압니다. 당신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외모는 얼굴을 뜻하는 , 당시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당신은 사람 눈치도 보지 않고, 솔직하고 진실되게 하고싶은 말을 하시는 분이시니,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솔직한 대답을 유도한 이유는 이어지는 그들의 질문이 함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어서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카이사르 황제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옳지 않습니까? 당시 로마의 황제는 유대지방의 모든 사람들이게 세가지의 세금을 걷고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토지세로 곡식의 10분의 1 기름과 포도주의 5분의 1 내야 했습니다. 두번째는 소득세로 모든 수입의 100분의 1 내야 했습니다. 세번째는 인두세로 14~65세의 모든 남자와 12~65세의 모든 여자가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물어본 세금은 세번째의 인두세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인두세는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 황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세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겐 매우 모욕적인 세금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는 세금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시아라면 반드시 세금을 거부하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 로마에 저항했던 유대인 지도자 중에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인두세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로마는 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서 걸어놓았고, 이를 통해 세금을 거부하는 자의 운명은 비참한 죽음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자는 반드시 인두세를 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인두세는 이처럼 첨예한 논쟁과 갈등 한가운데에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함께 예수님께 나아갔는지를 이해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로 몰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면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가려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한 자는 돌을 던져 죽일 있었고, 반역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눈치보지 말고, 진실된 말을 하라고 하면서, 말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함정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은 말장난과 같은 이들의 계략과 계략안에 있는 그들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외식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것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칭찬을 하고, 마치 존경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대했지만 실제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존경받은 신앙인처럼 보였고, 고귀한 고관들처럼 보였지만 실제 이들의 속내는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온갖 중상 모략과 아첨과 속임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라고 외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리 그럴싸해보여도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살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진실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진실되지 않게 나아간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19~22 말씀입니다.

 

19   세금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금 돈을 내게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다시 그들에게 요청을 하심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즉각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틀을 벗어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새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탁월한 토론의 방법입니다. 유도심문을 틀에 박힌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 앞에서는 대답 대신 새로운 질문이나 새로운 상황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의 입술에서 동전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동전은 은화였는데 선명한 그림과 글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디베료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고, 신의 지존하신 아들 디베료 황제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황제의 아녀였던 리비아의 좌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동전 자체가 우상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이요, 억압통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동전에 주목하게 하는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즉시 깨달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확인하듯이 다시한번 물으셨습니다. 형상과 글은 누구의 것이냐? 질문은 누가 스스로 자신을 신의 지존하신 아들이라고 참칭하고 있느냐? 누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 놓았느냐? 누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전을 보면서 대답할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카이사르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세상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고, 오직 부와 권세만을 탐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려는 카이사르의 세상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이 사는 하나님의 세상으로 나뉘게 것입니다. 주님은 자리를 선명하게 드러내시면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의 법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살아가라 선포하셨습니다.

 

문제는 세금을 내느냐 내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이 하나를 선택하라 했지만, 세금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도, 세금을 내라 주장했던 헤롯당원들도 모두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 와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죄악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권위를 흔들고, 자기의 생각에 반대하고, 자기를 모욕했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길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을 초월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 ,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 그것을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당신의 말씀을 당신의 삶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삶과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지극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의 진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놀라운 사랑은 얼마되지 않아 로마를 뒤집었습니다. 세금으로는 흔들리지 않았던 로마가 사랑에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것입니다. 결국 로마는 수백년이 안되어 돌무더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류의 사상이자 뿌리가 되었고, 지금도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이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르니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른 한편으론 세상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과 교회에서 살아가는 삶의 분리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넘어서는 해석으로 가이사의 것도 결국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안에서 가이사의 것을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원칙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저는 두번째 관점이 괜찮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카이사르의 법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높이려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는 무서운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때에 이러한 함정에 더욱 깊이 빠집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뿐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에 매여, 사랑의 길로 순종하고, 나아가 사랑을 드러내는 , 그리하여 사랑으로 모든 카이사르를 무장해제 시키고, 사랑으로 새로운 나라를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길입니다.

 

오늘 논쟁은 세상의 길과 주님이 길이 어떻게 다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상은 방법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주님은 원칙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방법을 하나님처럼 여기면 세상은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칙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세금을 내느냐 내지 않느냐의 문제는 서로를 죽이는 답만을 가져오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것이 되라는 선포는 근본적인 사랑과 용서라는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중심을 무엇으로 두어야 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나는 인생의 뿌리를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에 두고 있는가? 나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는가? 나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살아가는 ? 하나님의 것이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진실되게 응답하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