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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에 관하여 (2021.06.27.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22:23~33)

 

마태복음 22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아내를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날이 무척 덥습니다. 성도님들 간밤에 무사히 주무셨는지요? 저도 오랜만에 한국에서 느꼈던 더위를 느꼈던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환경이 나빠지면, 가장 연약한 이들부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생각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환경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과 연속되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과 토론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하는가의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사실 질문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유도질문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선포를 하였습니다. 세금을 내고 안내고의 문제보다 문제는 어떠한 선택을 하든 선택의 근본적인 동기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헤롯당 모두 자신의 권위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카이사르적 태도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토론이후에 바로 있었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물러나자 사두개인들이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사두개라는 말은 사독의 후예라는 뜻이었습니다. 아침묵상을 계속 들으셨던 성도님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전통을 이어온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스렸던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 그룹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면서 현실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중에 모세 5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신앙적으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는 예언서나 지혜서, 묵시서와 같은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인정하지 않았고, 천사나 영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세를 부정하였고,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모두 소멸하고 만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주장하였고, 하나님의 섭리도 부정하였습니다. 어떤 신비로운 자체를 부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과학만을 인정하고 종교를 부정하는 현대인들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정치사회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인정하였고, 로마의 통치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정부와 타협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들은 당대 바리새인들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부터 냉대를 받았으나 이를 개의치 않았고, 헤롯왕과 로마 총독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이 때에 예수님은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질서를 흔들고, 성전의 권위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고 현실적이었던 그들은 예수님이 선동가요 사기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부활에 관한 신학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23~28 말씀입니다.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아내를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선생님이라면 어디한번 대답해보십시오. 이어서 그들은 모세가 선포했던 신명기 25 5~6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신명기 25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의무를 그에게 행할 것이요

6   여인이 낳은 아들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것이니라

 

이들은 어떤 결혼을 사람이 죽게 되면 형이나 동생이 사람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가상의 상황을 펼쳐 보였습니다. 일종의 생각 실험을 것입니다. 어떤 7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결혼했다가 죽어 둘째가 형수를 자기의 아내로 삼고, 둘째도 죽어 셋째가 형수를 아내로 삼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였다고 합시다. 훗날 모두가 부활한다고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부활을 가정하지 않고, 세상만의 만을 가정한 선포된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부활에 대한 가정이 없다면, 우리가 새롭게 부활을 말해서 되겠습니까?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으로 땅에서의 삶만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니, 부활이니 이런 엉뚱한 말로 사람들 선동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러한 뜻을 예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29절부터 33 말씀입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이후의 세계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모든 관계들이 하늘의 천사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같습니다. 그때에는 영원한 생명과 충만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세상이 것입니다.

 

사실 부활 이후의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우리는 아직 없고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서 부활하신 분은 오직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부활이 어떠한 것인지 대충 유추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전의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대화하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한 이후에 땅에서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짐을 이해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제자들이 몸을 만질 있었습니다. 부활이 그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임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부활이후의 삶속에서도 먹을 있고 입을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전의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이었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몸이기도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활은 그저 죽은 사람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거기에 이어서 관계 또한 새롭게 정립된다는 것을 선포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세계를 상상할 없듯이, 물속에 살고 있던 잠자리 유충이 물밖으로 나와 잠자리가 새로운 세상을 상상살 없듯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창조되고 새로운 몸으로 살아갈 부활 세계를 상상할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은 그저 땅의 현실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현실 넘어를 꿈꾸는 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현실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시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시공간을 넘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실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관점으로 가두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능력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제한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소망도 발견할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이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출애굽기 3 6절을 인용하여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6   이르시되 나는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사실 다니엘 12 2 말씀을 보면 부활이 구체적으로 증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오직 모세 5,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설득하신 것입니다. 말씀에서 보듯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장이 모두 현재형이었습니다. 마치 지금 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안에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들이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며 하나님께서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앞서 말씀 드린대로 사두개인들의 모습과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를 설명할 있는 가장 유명한 말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입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앎을 통해 번영을 이루려 하는 근대사회, 현대사회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알면 알수록 그것이 우리의 풍요로움이 되고, 우리의 건강이 되고, 우리의 행복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역사를 전례 없는 번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려고 하는 강박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너무 귀하게 여기다 보니, 우리는 모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름이 반드시 존재하고, 때로는 모름을 모름으로 두어야 하여, 심지어 모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은 우리가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미래의 모름은 모름으로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두어야 할까요? 바로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역으로 맡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가는 길에 홍해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집트 전차가 이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 생각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때 미래를 예단해서 미리 절망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름을 모름으로 남겨두는 , 그리고 자리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또한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이해하고 서로를 알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를 아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속을 완전히 없습니다. 열길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의 마음과 사정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 마음이 급해 운전을 나도 모르게 급하게) 나아가 모름을 깊게 이해한 사람은 관계의 본질이 결국은 믿음이라는 , 나아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믿기로, 나아가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부활에 관하여, 하나님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두개인은 예수님께 부활에 관하여 설명해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설명하기 이전에, 사두개인들의 모름을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부활은 우리의 언어로 이해할 없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하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방식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일부분만을 받아들일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모든 삶을 맡기고, 관계를 맡기고 나아가 죽음이후까지 맡기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름을 방식대로 채우려 들지 않고, 모름을 모름으로 , 그저 신뢰하는 ,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름에 관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