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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하는 (2021.11.14. 주일 예배 설교. 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자기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정승 개가 죽으면 사람이 몰려들어도 정승이 죽으면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속담은 세상 사람들의 민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부와 권세가 있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있을 같은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부와 권세가 사라져버리고, 이상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어지게 되면 모두 그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리기도 했었는데요, 윌콕스의 고독이라는 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혼자만 울게 것이다. 참으로 세상이 비정하고 씁쓸한 면이 있음을 고백하는 입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에, 고난과 역경은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친구를 알게 해주는 귀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들이 사라졌을 , 누군가의 도움만이 필요할 때에 그때에도 함께 자리에 있어 주는 친구,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고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들을 보게 되면, 친구가 진정한 친구구나 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한 벗이 되어준다는 것은 사람의 상황이나 형편이나 어떤 조건을 넘어서 그의 곁에 있어주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는 그래서 사랑은 같은 입장이 되어주는 것이라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에게 이러한 사랑과 의리를 보여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말씀 57절에서 61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자기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가 되셨을 때에 임종을 하셨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하시고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였습니다. 보통 이렇게 십자가 형에 쳐해진 사람은 죽은채로 방치되거나 아니면 십자가 너머에 언덕에 그대로 버려지곤 하였습니다. 십자가 형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에 대한 처벌이자, 사회에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제국이 두려워서 감히 십자가 형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까지 처절한 불명예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십자가형에 쳐해지고 비참하게 죽게 되자 예수님의 열두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로마군인들에게 잡혀서 이렇게 죽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돌아가셨기에 하나님으로부터도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따랐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엄청난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숨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날 저녁 아리마대의 부자였던 사람,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달라 요청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칫 예수님과 한패로 몰려 반역의 무리로 오해 받을 있는 일이었고, 특별히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목숨까지도 위협 당할 있는 일이었습니다. 실제 이후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받해를 받았고 심지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분은 돌에 맞아 죽고, 야고보는 목이 잘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밤에 아리마대 요셉은 목숨을 걸고 빌라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상 긴장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지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주라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받은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정성껏 장사 지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몸을 가져다가 닦고, 깨끗한 세마포로 그의 몸을 감쌌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염을 함께 지켜보았는데, 자체가 고인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몸을 닦으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몸에 세마포를 감싸며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자기가 쓰려고 했던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시체를 눕히고 바위로 무덤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계속해서 요셉을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둘문을 막자 여인은 앞에서 무덤을 향해 앉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들을 베풀고, 많은 이들을 먹이시는 기적들을 베풀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에,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저주를 받았을 때에는 정말 소수의 사람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돌아가신 예수님께는 받을 것도 없고, 오히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여인들은 예수님의 곁에 끝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이 순간에 예수님 곁에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기꺼이 모든 것을 감수했고, 주님의 죽음 곁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곁에서 바라본 사람들이 되었고, 나아가 부활의 영광을 가장 먼저 준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새벽을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나 성공을 바라보며 따라갔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실패와 죽음 앞에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던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에 끝까지 함께함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승리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를 보면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자리를 다시 생각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희망이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이 점점 깊은 어둠으로 빠져든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의지했는데, 주님께 날마다 나아갔는데 주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보이는 우리 주님을 경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우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그저 사랑하시기에 우리 또한 주님을 그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어머니 마리아가 우리 주님의 장례를 치를 때에 우리 주님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 생각하고 치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이와 같이 것입니다. 우리다 이들처럼 우리 주님을 그저 사랑하는 , 그것이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 주님을 그저 사랑하고 기뻐하는 , 그저 우리 주님 편에 서는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은 이렇게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순간 사랑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62~66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62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사랑하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 것에 대한 두려움, 망할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나서도 예수님의 영향력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들은 혹시 남아있는 제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권세를 흔들까 걱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그리하여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앞서 요셉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빌라도를 찾아갔는데, 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말했습니다. 사기꾼 예수가 살아있을때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총독께서 명령하여서 그의 무덤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숨켜 놓고서는 사람들에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사기를 치고 다닐까 걱정됩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더욱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요셉과 여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곁에 있었는데, 이들은 두려운 마음 때문에 병사들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것입니다.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보내어서 돌을 아예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못할 , 우리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가졌으나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것이 흔들리지 않을까, 자신의 것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지면 모두가 자기를 떠나고, 결국 세상 속에서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나머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고 뒤에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 심지어 주님의 시체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것으로 사기를 치고 다닌다면 그것이 어떻게 성공할 있겠습니까?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두려워하였고 걱정하였습니다.

 

주님을 알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희망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시리라는 희망을 찾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할 , 주님의 능력을 보았던 무리들이 가졌던 희망입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무리를 먹이고, 이적들을 베풀 때에 제자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꿈꾸었던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를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조금씩 키워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두려움을 완전히 내어쫓지는 못합니다. 두려운 현실을 이겨 나가는 힘이 뿐입니다.

 

걸음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두려움을 내어 쫓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의 두려움에 쫓겨 다닙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두려움을 주님의 힘으로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현실의 두려움을 개의치 않게 됩니다. 마치 불난 집에 자기 아이가 있으면, 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리하여 기꺼이 집에 들어가서 아이를 꺼내오는 것처럼, 사랑은 두려움을 개의치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심지어 죽은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하면, 주님께서 나를 보답해주시겠지, 그런데 보답해주시기 않아도 나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기꺼이 기쁨으로 일을 할거야. 그러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은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예비하셨습니다.주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갚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신 성도님들이 있다면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사람이 되면 우리 주님이 두려움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주실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이미 알고 의지하고 신뢰하시는 성도님들이 있다면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이상 두려움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